이작품은 모성애와 부부애의 갈등을 표현한 작품으로 1920년대의 미국 사회의 단면과 가족간의 갈등을 세밀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당시에 문제작으로 평가된다.
일찍 남편과 사별한 팰프스 부인의 모든것은 두 아들에대한 사랑뿐이다. 유럽에서 돌아오는 장남 데이비드 부부와 그리고 둘째아들인 로버트와 그의 약혼녀 헤스타가 오랜만에 집에서 만나는데 이 펠프스 부인의 관심은 아들에게만 있고 며느리인 크리스티나와 약혼녀인 헤스타에게는 냉담하기만 하다 결국 로버트를 압박해서 헤스타와 파혼하게 만들고 데이비드와도 크리스티나와 결별할 것을 강요하기에 이르나.. 헤스타의 자살기도 그리고 펠프스와 크리스티나 사이의 언쟁으로 병적인 모성애의 이면이 들어나며 상황은 파국으로 이어지는데....
그러나 큰 아들인 데이빗은 그의 부인 크리스로부터 영향을 받아 어머니로부터 탈출한다. 그러나 작은 아들인 로버트는 약혼녀인 헤스터를 떠나 보내고 어머니에게 귀화한다. 로버트 자신이 말했듯 탈출할 수 있는 용기가 없는게 아니라 탈출하기엔 너무나 어머니의 모성애의 지배에 완전히 흡수당했기 때문이다. 데이빗의 경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선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크리스가 말하듯 「젊음의 재산은 호기심」이고 또 「젊기 때문에 술 없이도 취한다」와 같이 생존경쟁의 대열 속에서 실패와 성공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격돌함으로써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정을 이끌어가는 힘과 용기가 탄생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버트의 경우 자기 자신에 대해선 실패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한거와 같이 「어머니가 나에게 심어준 이상. 그 이상때문에 파혼했던거야.」 그러면 그 이상적인 여인이란 결국 어머니와 같은 여성이어야 한다는 결론인데 그러한 여성이 있을까?
이러한 관점으로 볼때 로버트가 갖는 개인적인 사상과 감정과, 이상과, 꿈과 사랑 등,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로버트에겐 비극적이라고 볼 수 있는 반면 어머니의 모성 지배 심리의 욕구에 희생의 제물이 되어가는데서 연민의 정과 동정심, 또한 희생정신이 우리에게 공감을 준다. 결국 팰프스 부인으로서는 대이빗에겐 실패했으나 로버트에겐 성공을 거둔 셈이나 따지고 보면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도 없고 서로가 자기의 갈길을 (그게 어떤 길이던간에) 가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시드니 하워드는 놀랄 정도로 인생의 체험, 심리 성격 묘사에 사실적이고 진실되게 내면의 세계를 파헤쳤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수 없다.
하워드의 작품은 쓸데없는 과장을 피하고 어디까지나 진실을 중히 여기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모성 지배심리를 폭로한 헨리 입센이 당시 신문 사회면의 한 기사를 노라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물의를 일으켰듯 팰프스라는 한 여인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그 자신은 이 극을 일컬어 「뉴욕인의 성공에 따른 네 가지 삽화」라고 밝히면서 『뉴욕 생활의 보기엔 깔끔한 지평(地平)을 스쳐 그 모든 헐값짜리 표준과 철학 가운데 흔들리는 추와 같이 왔다 갔다 하는 미국사회의 두 개의 가장 눈에 띄는 극단을 표시하고자 한다.』라고 作意를 밝힌다.
이 극에서는 어머니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의 성장한 자식을 자기 치마끈에 매어두려고 애쓴다. 그중의 하나는 그 아내가 틀어 자기 남편을 그런 모성의 함정에서 위기일발의 직전에 구출하기에 이르고 또 작은아들은 그의 약혼녀가 자살을 기도 하기에 이른 뒤로는 자기 모친과 동거하면서 그의 생명을 파괴한 대가로서 어머니가 아낌없이 퍼주어주는 보호와 아첨을 받는데 만족하고 만다. 이같이 이 극의 효과는 일부는 행복하고 일부는 비극적이라는 그 이중결말에 있다. 미국의 평론가 다우너에 의하면 「종전의 극들도 물론 방만한 타입의 모성(母性)을 취급한바 있었지만 그것은 강짜부리는 마누라 따위의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고 또 대개 끝에 가서는 패배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이 극에서 팰프스(Phelps)부인이 반은 승리한다는 사실을 작가가 구사하는바 힘이 극적으로 효과적임을 표시한다. 기분상으로 할 것 같으면 그 여자가 완전한 패배를 당해야 속이 시원하겠지만 그래서는 이치가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밝힌다. 사실 극 진행상의 수법을 분석해 보아도 역시 맏아들이 자기 어머니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그가 정말 어머니의 영향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또 하나의 여인, 즉 자기 아내의 더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는 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현대연극에 있어 처음으로 진지하게 제기된 이 테마 및 기본국면의 현실성은 작가 하워드가 이따금 예술을 벗어나 극작의 기교면에 빠져버리는 폐단을 메꾸고도 남음이 있다는 점에서 이 극은 높이 사는 것이다.
시드니 하워드(Sidney Coe Howard, 1891년 6월 26일~ 1939년 8월 23일)는 미국의 극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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