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5년만에 연극학 학사,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한상실씨의 작품으로 유학당시 이 희곡을 불어로 쓰고 무대에 올려 당시 호평을 받은 작품이란다.
작품의 전반부는 창녀와 신부가 등장한다. '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 나신이 되므로써' 순수를 보여주는 창녀와 도덕과 같은 사회의 옷을 버리지 못하는 신부의 충돌이다. 창녀를 좋아하게 되는 신부, 처음부터 신부를 이상형으로 사랑하게되는 창녀... 그러나 이 사랑은 파경을 맞게 되는데... 신부는 그녀를 외면하고 창녀는 뱃속에 잉태된 신부의 애를 간직한채 떠나게 된다. 사회가 부여한 이름이나 지위가 주는 수치심과 두려움(신부)에 인간의 본 모습 (창녀)과의 대립, 또는 문제를 제기한다. 후반부는 20년 후이다. 인간화한 고대그리스의 은신 '헤라'와 '주피터'로 부리는 두 어린이가 등장한다. 이들은 신성과 인성이 본래 하나였음을 상징한다. 헤라와 주피터는 신의 이름을 위해 또, 인간의 이름을 위해 사람들끼리 서로 죽였던 과거를 얘기하며 교회가 사라진 자리에 가축사육장이 더 어울린다고 말한다. 이어 인간이 돌아가야할 모습으로 창녀와 신부사이에서 태어난 바다(BADA)가 등장한다. 그리고 신부와 재회하는데....
대담한 노출이 화제가 되었던 초연 무대는 노출이 외설로 비치지 않은 것은 많은 상징과 사유를 담고 있는 연극의 진지함때문이리라.
프랑스에서 훈련받고 돌아온 한영원이 쓰고 연출한 <바다와 창녀>는 나이든 신부(최상길)와 어린 창녀(한영원)의 실패한 사랑을 추적합니다. 맞습니다. 창녀의 순수가 신부의 위선에 회생당하는 상투적인 이야기입니다.
인물설정이 극의 주제를 태생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이지요. 인간적 욕망을 가장 억압해야 하는 신부와 그것을 상품으로 삼고 있는 창녀. 사회 적 위치의 구속을 당하는 신부와 지켜야 할 체면을 벗는 창녀. 거짓의 옷을 겹겹이 입고 인간의 정신을 표상하는 신부와 진짜 알몸으로 인간의 육체를 주장하는 창녀. 두 사람의 사랑은 이런 상투적인 패러다임 속에서 실패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요컨대 인간의 참된 내적 순결을 기만적인 외적 거룩이 짓밟는 인생의 초상을 통해서 작가는 사랑을 상실한 우리 시대의 중병을 신화적으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K형. 극은 얼핏 해방된 인간과 구속된 인간의 갈등을 도해하는 듯하지만 찬찬히 따져보면 창녀 역시 갇힌 인간임이 드러납니다. 글쓰기보 다 무대만들기에서 그 점이 더 확연해집니다. 비록 창녀는 인간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진실할 수 있는 바다로 가기를 원하지만 그는 극이 진행되는 동안 거의 내내 자신의 알몸을 비추는 거울 앞과 타인의 욕망을채워주는 붉은 침대 위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습니다. 객석과 무대를 창 살로 가로막은 조윤경의 무대장치는 신부와 창녀 모두를 싸잡아 가둬둠으로써 두 인물을 자유함과 구속됨으로 차별화하지 않습니다. 창살 너머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분명 욕망으로의 해방을 외치는 것 같은데,객석에서는 그것마저 창살의 존재 때문에 또하나의 갇힘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작가의 외침을 단순히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상투적인 권고로 폄하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운명의 굴레에 대한성숙한 인식의 단초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극의 후반부에서 창녀가 떠나버린 뒤 신부는 자책과 회한으로 말을 잃는 데, 전반부에서 그의 내적 갈등이 필요충분하게 씨뿌려지지 않았기 때문 에 이 때늦은 고통스러워함에 극적인 힘이 실려지지 않더군요. 더구나 신부역의 최상길이 내적으로 분열된 복합적인 심리를 가까이 접근하지 못해글쓰기의 결함을 전혀 보완해주지 못합니다. 창녀역의 한영원 또한 우리 말 표현이 서툰 데다 욕망에 충실한 자의 폭발적 자유로움을 뿜어내지 못합디다. (김윤철의 평)
작가의 글
인간이란 무엇인가?
과연---
마리아, 예수---
혹은 신부, 창녀---
어머니, 아버지, 아이---
불란서인, 인도인, 한국인---
기독교인, 천주교인, 유태인---
교수, 학생---
인간, 과연 무엇인가?
스러지고 동시에 불멸하는 존재.
그럼, 무엇이라 정의할는지?---
삶. 너무 간결하잖아, 연설처럼.
그렇다면, 나무, 돌, 한 조각 하늘, 흙 한줌,
한줄기 빛, 바다 물방울---
이 모든 것이 인간을 향한 모욕, 유치한 판단, 교만함,
우리를 사살하는 무기, 그리고
우리의 지적인 삶보다 더 길지 않겠는가!
낙천가가 되어 보자!
이 모든 것이 단지 악몽에 불과하다면,
왜 다시 시작해 보고, 재구성할 수 없단 말인가!
또 다시. 왜, 서로 만나는 것을, 서로 단결하는 것을,
마침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그토록 방해했던
유산적 습관을 매장할 수 없단 말인가!
한 창녀와 사랑을 나누는 신부,
바다―단지 이름만이 아닌―와 신과의 사랑,
회교도와 마리아와의---
우리의 명명된 허위 가죽을 벗어 치워야 만 할 것이다.
또, 그 본질까지 내려가 봐야 할 것이다.
내 진정한 자아와 나의 다른모습의 자아를 만나야할 것이다.
"나"와 한 다른 "너" 가 아닌,
그러나 "나"와 여러모습 신을 만나는 "너" (그러나 또다른 "나"인) 의
여럿형태의 자아를 만냐야 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꿈을 꾸는 동물이므로--- 또, 그 꿈은, 미친자의
몽상만은 아니므로---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자유를 두들겨 패는
YES 의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에게 WHY 라는 무언의 질문을 던지도록
마련하기 위한 한 개의 쉼표를 갖아보기 위함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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