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유현종 '우리들의 광대'

clint 2018. 3. 26. 10:19

 

 

 

줄거리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겠다고 서울의 명문 음대 작곡과에 입학한 김혁진은 알바를 해서 2학년까지는 다녔지만 3학년에 올라가서 학자금 100만원이 모자라 결국 군대에 입대한다. 제대 후에는 학비가 없어서 취직을 하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지만 불러주는 데가 없어서 친구의 하숙집에 얹혀 빈둥거리다가 어느 날 가야금을 발견한다. 그 날 이후 하숙집 주인 딸 여옥에게 가야금을 배우면서 사랑도 함께 키워나간다. 그러다 비슷한 처지의 음대 친구들과 함께 우리의 젊은 세대들에게 우리 음악의 혼을 심어주자고 합의가 되어 국악그룹 태평천하를 결성하고 빚을 내어 국악기를 사고 연습실을 마련하여 연습에 들어간다. 그리고 고아원, 양로원, 교도소 같은 곳에 무료자선 공연을 다니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워 밥은커녕 라면도 먹을 수 없는 형편에 이르자 악기를 팔고 연습실은 빚쟁이에게 빼앗긴다. 그 후 그룹을 재건하기 위하여 후원자를 찾는 가운데 같은 멤버 병석이가 중학교 선배인 강철을 소개한다. 그는 대 그룹의 아들로 음악적 재능은 부족하지만 미국 유학을 다녀온 경영능력이 탁월하고 박력이 넘치는 인물일수있습니다.. 새로운 후원자 강철은 이름을 카리스마 보이스로바꾸고, 외제 악기를 새로 구입하여 청평의 넓은 별장에서 풍족한 가운데 그의 자작곡으로 연습에 들어간다. 그러나 연습에 들어가자 본인이 반음이 처져서 화음이 맞지 않자 화를 내며, 음대를 다닌 사람들이 화음을 모른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상황이 악화되자 기존의 멤버들이 화장실에 모여 합의를 한다. 강철에게 맞추어 모두 반음씩 내리기로...결국 온음이 반음에게 굴복을 하게 된 것일수있습니다..또한 콘서트와 방송이 며칠 남지 않아 맹연습을 하는 상황에서 강철은 갑자기 남자들만 있으면 인기가 없다며 여자 백댄서가 필요하다는 제의를 한다. 혁진이 반대하는 가운데 강철의 추천으로 여옥이 선택되어 연습을 하는 도중에 임신 과로로 쓰러진다. 출혈 과다로 출연이 어렵다는 혁진의 말에 강철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콘서트 준비 비용을 물어내라고 종용하자, 혁진은 여옥을 설득하여 어렵게 전국 투어 콘서트가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들의 광대 추송웅 “연기자(演技者)의 운명이란 한 마디로 채찍을 맞는 죄인입니다. 5백회나 돌파했다 함은 살을 파고드는 채찍을 5백 번 맞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몇번의 채찍을 맞았으며,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맞아야할지 셈하지 말 것이며, 그저 묵묵히 채찍을 견디며 전생(前生)에 지은 죄 갚음만 해야 하는 운명, 그것이 바로 연극배우의 슬픈 운명입니다.” 천의 얼굴을 창출해 내는 연극배우 추송웅(秋松雄)의 고백이다. ‘빨간 피터의 고백’과 ‘우리들의 광대’란 모노 드라마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우리나라 연극계에 신화와 기적을 창조한 연극배우가 추송웅이다. 이따금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얼굴을 내밀곤하여 우리와 친숙해진 연극배우 추송웅-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가을 광주 어느 극장의 분장실에서였다. ‘빨간 피터의 고백’ 밤 공연을 앞두고 스탭과 더불어 연습에 열중하던 그가 잠깐 휴식을 취할 때, 나는 그와 인사를 나눴다. 너무 낯이 익은 탓인지 초면인데도 구면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약간 사팔뜨기의 눈,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 걸맞지 않은 팔자걸음……. 그의 외모에서는 인기 절정의 연극배우로서 있을 법한 기고만장한 스타의식을 찾아낼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친구 같은 친근감을 느꼈다. 빠듯한 일정의 전국순회공연 탓인지 그의 입술은 부르터 있었다. 남원 방송국의 개국 기념일은 10월 25일이다. 해마다 이 무렵이 되면 개국기념 행사를 갖는 게 하나의 관례가 되고 있다. 내가 방송부장으로 부임한 첫 해에는 서울 시립국악관현악단을 초청하여 공연을 한 바 있다. 남원이 국악의 본고장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판소리나 기악연주가 국악의 전부인 양 여기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울시립 국악관현악단을 초청, 정통 궁중음악을 선보였던 것이다. 공연은 대 성공이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S고등학교 Y교장은 내일 다시 한 번 더 앵콜 공연을 해 줄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S고등학교 전교생에게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1985년은 남원 방송국 개국 33주년이 되는 해였다. 방송이 지역 사회 문화창달의 기수로서의 소임을 다 해야 한다는 뜻을 모아, 연극 불모지인 남원에서 본격적인 연극의 정수를 선보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연극배우 추송웅씨를 초청, 처음으로 모노드라마를 공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연장다운 공연장이 없는 남원의 실정에서는 모노드라마가 가장 제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연극계 데뷔 22주년 째를 맞은 추송웅씨에게는 ‘빨간 피터의 고백’과 ‘우리들의 광대’ 라는 두 편의 모노드라마가 있었다. 어느 작품을 무대에 올릴 것인가 고민했었는데, 추송웅씨는 ‘우리들의 광대’ 를 원했다. 전주 출신 작가 유현종(劉賢鍾)의 작품인지라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그렇게 결정을 보았다. 마침내 막이 올랐다. 비좁은 극장이 찢어질 듯 관객이 몰려들었다. 낮공연이나 밤공연 모두 다를 바 없었다. 수천 개의 눈동자가 무대위의 추송웅에게로 쏠렸다. 관객들은 그의 대사와 몸짓을 보고 들으며, 웃기도 하고 박수와 환호를 보내기도 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응원단처럼……. 데뷔이래 22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무대에 섰던 추송웅. 동아 연극상 최우수 남자 주연상과 한국 연극 영화 예술상 최우수 남자 연극 연기상을 수상했던 추송웅. 국내 공연은 물론 해외공연의 경험이 풍부한 추송웅. 그는 타고난 광대였다. 무대에 서면 절로 신명이 나는 연극배우였다. 추송웅 씨가 남원에 도착한 것은 공연 전날 밤 11시쯤이었다. 그는 도착 즉시 극장으로 달려가 연습을 하고 나서야, 때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낮 공연이 있기 전, 또 밤 공연이 있기 전 다시 연습을 했다. 스탭들이 주눅들 정도로 엄하게 꾸짖어가면서 연습을 되풀이했다. 한 번 공연이 끝나고 나면, 미진했던 대목을 기억해 두었다가 보완하곤 했었다. 전국을 순회하면서 5백회가 넘도록 공연을 한 바 있는 ‘우리들의 광대’ 라는 바로 그 연극을 말이다. 추송웅씨의 모노드라마가 오랜 세월 경향각지에서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게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그 인기는 피와 땀의 결정체였음을 엿볼 수 있었다. 끈질긴 집념의 장인기질(匠人氣質)을 그는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연극배우 추송웅의 연극에 임하는 진지한 자세에서, 내가 어떻게 삶을 꾸려나가야 할 것인가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5백회가 넘도록 공연을 했던 연극이라곤 하지만, 단 한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된다면, 이제까지 환호하며 갈채를 보내던 관객들은 언제 그랬더냐 싶게 비정하리 만큼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게 아닌가. 연극배우 추송웅은 그러한 관객의 비정(非情)을 알기에 매 공연마다 그 공연이 최초이자 마지막이란 자세로 임하는 것 같았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나’ 라는 존재는 사각의 링 위에 올라 선 권투선수처럼 고독하고 위험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지느냐 이기느냐의 양자택일이 불가피한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게 ‘나’ 요. ‘우리’ 가 아닌가. 링 주변에는 응원하는 관중도 있고, 작전을 지시해 주는 사범도 있지만, 일단 공이 울리고 나면 오직 혼자서 싸워야 하는 권투선수처럼, 나도 그렇게 세상을 살아 갈 수밖에 없는 노릇인 것을…….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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