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N군 상륙작전 직후인 1951년 사월초이다. 아직도 전투지구인 서울은 거의 비어 있다. 그러나 동대문 시장만큼은 많은 빈민들이 몰려 있고, 사기꾼, 밀매꾼들까지도 뒤섞여 있었다. '빈민구호소'라는 명목하에 일반 서민에게 죽을 파는 소장도 빈민들의 푼돈을 착취하며, 암거래를 연결시키는 부패한 인물이다. 그리고 땐서홀의 작부로 전락한 로오즈매리(백련), 직업적인 소매치기단들인 클레오파트라와 미꾸리, 약혼자인 철을 기다리며 담배를 파는 희숙 등이 있는데, 희숙은 철을 만나게 된다. 철이가 나타났으나 희숙의 올케인 정애는 그를 증오한다. 이유는 남편을 북으로 납치시킨 인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희숙은 전쟁통에 가슴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상처를 안고 그를 만날 수 없다고 결심한 희숙도 철을 멀리한다. 결국 괴로와하던 철은 자포자기하여, 매춘굴을 드나들고 퇴폐적인 클레오파트라와 어울리게 된다. 미꾸리와 클레오파트라는 암거래로 판 다이아를 다시 훔쳐오고, 소장은 로오즈매리 등의 댄서들의 돈을 사기치는 등 부조리가 만연하다. 철은 계속하여 타락해 가고 보다못한 희숙은 그를 설득하여 부산으로 보내려 하나 실패한다. 이로 인해 정애는 가슴앓이를 한다. 철은 삼룡을 통해 희숙의 진실을 알아내고 오해를 푼다. 정애도 그를 용서한다. 둘은 부산으로 가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막 떠나려고 준비하는 순간, 클레오파트라가 나타난다. 그녀는 질투심에 총을 쏘고, 그 와중에 희숙은 자살해 버린다. 홀로 남은 철은 과거의 실책과 정애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절규한다. 결국 그는 경찰서로 연행되고, 한강을 건너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강은 흐른다에는 전쟁으로 가슴에 상처가 난 희숙 전재민 구호소를 차려놓고 부산상인과 결탁한 위선적인 소장 소매치기 미꾸리와 그의 동거인 클레오파트라 암담한 현실에 자신의 이상을 포기한 로오즈 메리 희숙의 변심하여 그녀와의 결혼이 성사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바관하여 폭력적으로 변한 철 등 다양한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우연히 약혼자인 철과 재회하게 된 희숙은 처음엔 그를 매우 반긴다.그러나 곧 자신의 처지를 인지하면서 철에게 매우 냉담하게 대한다. 여기서 희숙 철의 극적 행동에는 리얼리티가 결여되어 있다.희숙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철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희숙의 행동에 일관성이 결여되어있다. 철의 성격은 희숙보단 자유자재이다. 희숙 오빠의 제자이며 희숙의 약혼자인 철은 공산주의 이념에 경도돼 한 가정을 파탄에 빠지게 하지만 그걸 후회하고 희숙의 대한 사랑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희숙에게 시를 써서 편지를 보낼 정도로 낭만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그러나 희숙의 변한 태도에 그는 갑자기 성난 말로 변한다. 물건을 부시고 사람들을 폭행하며 욕도 내뱉으며 문란한 행동도 서습지 않고 희수그이 앞에서 연출한다. 하지만 희숙의 사랑을 확인하고 다시 성실하며 온순한 양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급작스럼다 못해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들의 성격 변화가 사실감을 부족하게 만든다.

윤대성 극본 뮤지컬
유치진 원작, 윤대성 극본, 김우옥 연출, 김정택 극본, 박일규 안무로 이루어진<한강은 흐른다>는 일단 그 동안의 창작 뮤지컬들이 노정시켰던 심각한 한계들을 제반 측면에서 발전적으로 극복하고 있다. 웅장한 주제곡을 비롯한 음악들은 각기 개성이 있으면서도 적재적소에 녹아들었고 박진감 넘치는 안무는 대극장 무대를 빈틈없이 장악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를 총제적으로 관통하는 연출의 맥락은 유쾌한 웃음과 진한 페이소스의 조화였다.
제1막은 6·25 전쟁 당시 남대문 주변의 허름한 빈민가를 배경으로 난민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난민 구조사업을 한답시고 고아원에서 구호품을 빼돌리는 구호소 소장(이인철 역), 그 밑에서 꿀꿀이죽을 끓이는 삼룡이, 몸을 팔며 살아가는 창녀들, 미군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소매치기단, 전쟁고아 출신의 거지들과 구두닦이들, 이들은 모두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낳은 기형적 삶의 편린들이다. 한편 전장에 나간 애인을 학수고대하던 희순(김소영 역)은 애인의 전사 소식에 자살을 기도하지만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순철(유인촌 역)의 애정에 힘을 얻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난다.
이처럼 1막에서 ‘한강’이 던져주는 의미는 전쟁과 빈곤으로 집약되고 전쟁이 낳은 고아, 매춘, 범죄, 죽음, 이별 등의 뼈아픈 상처들이 생생한 아픔으로 되살아난다. 특히 전선에서 온 군인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되는 전우가를 비장하게 선창하고 철 모르는 아이들이 신나게 따라 부를 때 그 비감은 절정에 달한다. 한편 집단적 성격으로 나오는 창녀들, 소매치기단, 거지패, 구두닦이패 등은 각기 변별적인 행동 양식들을 특색 있는 춤과 노래로 표현함으로써 극 전반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고 희극적 재미의 원천이 되었다. 1막은 초연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으나 전보다 조연들의 연기가 뒤떨어져 자연 앙상블이 미흡했고 구호소 소장의 소극(farce)적 과잉 연기가 전체적 품위를 손상시켰다.
1막이 이별의 장이었다면 2막은 만남의 장이다. 무대는 1막과 같지만 시간적으로는 40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의 모습이다. 6.25 때의 포성 대신 노점상들과 단속반 원들의 숨바꼭질이 이어지고 데모대와 전경들의 공방전이 벌어진다. 희순과 순철은 결혼하여 옛집에서 전쟁통에 헤어진 오빠와 그 가족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데 브라질로 이민 갔던 조카 창호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6·25 세대들은 자녀들에게 과거의 고생과 가난을 역설하며 오늘의 경제발전을 자부하지만, 신세대들은 그보다 분단된 채로 남아 있는 조국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에 젊은이들이 ‘통일’의 구호를 격렬하게 외치는 가운데 무대가 캄캄하게 텅 비워지고 환상 장면이 펼쳐진다. 이산 가족들이 철벽 같은 철조망을 쥐어뜯으며 울부짖다가 어느 순간 분단의 벽이 일시에 열리며 헤어졌던 사람들이 뜨거운 재회의 포옹을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는 “한강이 흐르는 한 우리는 살아 있으리……”라는 주제가를 힘차게 합창한다.
오늘의 현실을 담은 2막에서‘한강’은 풍요와 함께 아직도 풀지 못한 민족적 한을 상징한다. 개작된 내용은 시대적 사회적 모순들에 대해 비교적 공정하고 균형있는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즉 도시의 발전 못지 않게 거기서 소외된 서민들 낱낱의 삶도 중요하며, 대학생들과 전경들은 다같이 민주화를 위한 희생양으로 파악된다. 피땀 흘려 이룩한 경제성장의 공로는 인정하지만 안일했던 통일정책은 여지없이 비판된다. 학생들의 맹목적 통일론에도 문제가 있으나 역시 통일의 비전은 그들의 몫이다.
마지막에 이산가족 만남의 기쁨을 나누는 환상 장면은 극의 전체적 의미를 응결시키고 축적된 감정 상태를 최대치로 고양시켜 객석을 온통 감동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한 맺힌 절규와 철조망의 굉음 속에서 분단의 벽을 넘어 굼뜨고 더딘 몸짓으로 조심스럽게 이루어진 해후는 차라리 한편의 시와 같다.


87년 초연에 이어 고쳐 만든 이번 무대는 작품, 연출, 연기 등 무대 제반 요소에서 더 나은 완성을 향한 여러가지 노력이 보였고 특히 송용태를 필두로 한 단원들의 기량과 앙상블 훈련의 정도가 향상됐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이 무대는 개인 민간 극단인 미추가 자력을 쏟아 만든 대형 뮤지컬<영웅만들기>나 예그린에 그 줄기를 두고 아예 뮤지컬을 목표로 한 시립 가무단의<땅 짚고…>와는 그 줄기도 다르고 그 목표도 다르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다시 오른 88 예술단의 새 무대<한강은 흐른다>는 한 가지 점에서만은 그들과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이 무대가 서양물이 많이 든 요즘의 음악, 요즘의 움직임으로 요즘 관객들에게 재미있는 무대, 즐길 수 있는 요소를 만들려고 애썼다는 점이다. 이들 무대의 음악과 움직임은 팝, 재즈에서 디스코 춤까지 동원됐고 장치와 의상에서도 되도록이면 볼거리가 많은 각종 수단을 끌어낸 것이었다.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자는 뜻으로 서비스 정신이 충만했던 셈이다.
6.25전쟁 얘기인 유치진의 희곡<한강은 흐른다>를 1막으로, 경제 성장 올림픽을 치른 잘 사는(?) 오늘의 얘기를 2막으로 꾸민 88 서울예술단이 새 무대는 유쾌하고 들썩대는 춤과 노래의 재미, 화려한 무대의 볼거리가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