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오태영 '부드러운 매장'

clint 2018. 1. 11. 17:16

 

 

 

줄거리

가면에 유달리 집착하는 두열과 하루에도 몇 번씩 목욕을 해야 하는 옥자 부부. 독립유공자 가문이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박암과 항상 홑이불을 덮어쓰고 그날만을 기다리는 소임 부부. 이들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자, 사돈지간이다어느 날, 박암의 며느리이자 두열의 딸인 미준은 남편인 경수의 외도를 참다못해 집을 나와 친정으로 간다. 그러나 미준은 자신의 오빠 이남의 부인인 정미 또한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게 되어 어이 없어한다. 한편, 과거 반공투사였던 아버지에 대해 반발심을 갖고 있던 이남은 양쪽 집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갖게 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양쪽집의 어른들은 그 이상한 냄새를 덮으려고만 한다. 결국 이남은 아버지의 강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악취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지하실로 내려가 땅을 파기 시작하는데......  

 

 

 

 

 

[작가의 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늘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진단하려면 어제를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어제란 해방 전후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근대사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크던 작던 공통적으로 무언지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다. 해방과 6.25와 분단이란 격변의 세월 앞에서 결코 자유스러울 수 없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럼 우리나라 사람들이 숨기고 싶고, 감추고 싶어 하는 <그 말 못할 사연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작품 접근에 있어, 본질의 문제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방법을 피하고, 멀찍이 조망하는 방법을 택했다. 한 그루의 나무를 응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젠 숲을 봐야하는 나이가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히 말해 멀리 봐야 객관적으로 정확히 보인다. 굳이 영감은 얻었다면 30여 년 전 소개되었던 <헤럴드 핀터>의 초기 작품 세계이다. 그는 모든 것이 구체적이기를 바라는 당시 연극무대에 전혀 구체적이지 않는 모호한 접근방식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했다. 사실주의 연극이 판을 치는 그 시기에 <핀터는 왜 모호함으로 접근했어야 했는가>에 대해,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심도 있게 들여다봤어야 했다. 직설법으로 말할 수 없는 사연들이 멀리 숲과 전체를 보는 방식을 터득하게 해 준 것 아닐까. 모호함이 끝내 모호함으로 끝나면 실패다. 또한 형식을 위한 형식도 실패다. 형식은 자기 색깔에 맞는 독특한 내용을 담아내야하며, 모호함의 차용은 구체성을 향한 수단일 뿐이다. 즉 모호함의 중첩이 이룩해 놓는 전체적인 또렷함, 이 접근 방법(형식)은 내가 쓰던 종래의 극작법에서 탈피, 새로운 변화를 꾀하자는 시도이기도 하다.

 

 

 

 

 

작품 주제는 우리 사회에 대한 진단이다.

우리 사회가 병든 구석이 있다면 무슨 병인가 분명한 진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 처방도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대한 진단은 매우 복합적이며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 단초는 일제 식민시대와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격변의 근대사 속에 숨어있지 않을까. 70을 바라보는 <두열>은 반공 일선에서 청춘을 불사른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은 집안에만 칩거하며 가면에 집착하는 이상한 삶을 살아간다. 무언지 부끄러운 것이 있고,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다. 그의 부인 옥자는 하루에 열 번도 넘게 샤워를 하는 이상한 증세를 가지고 있다. 몸을 씻는 게 아니라 과거를 씻으려는 결벽증 같다담하나 사이 바로 옆집은 사돈 <박암>의 집이다. 그의 부인 <소임>은 하루 왼 종일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사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오늘이 그날이냐?” 고 묻는다. 이불속에 숨어있어야 했던 과거의 아픈 기억 때문이며, 그날이 오면 홑이불을 벗어던지고 뛰어나가 춤추고 노래하며 만세를 부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임은 그날이 이미 지나갔는지도 모른다.”고 한숨 진다. 소임은 <그날>이 어떤 사람들한테는 비극의 날이었다는 것을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럼 다음 세대인 그들의 아들과 딸들은 어떤가? 박암의 아들 <경수>는 외간 여자를 침대로 끌어드린다. 불륜을 즐기기 위해 지하실에 비밀의 침실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의 부모들이 감춰야 할 게 많듯 경수는 침대속의 흔적을 감추기에 바쁘다. 남편의 불륜을 보다 못한 처 <미준>이 짐을 싸들고 집을 나온다. 갈 곳은 친정(바로 옆집) 밖에 없다. 양쪽 집에서는 근거를 알 수 없는 악취가 풍기는데, 미준이 친정으로 돌아오면서부터 두 집안의 오래된 비밀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그들은 악취의 진원지를 찾아 지하실을 파내려 가는데, 모든 역사가 그렇듯 가해자 입장에 섰던 쪽은 그냥 덮고 가자고 얼버무리고, 피해자는 끝까지 파보자고 소리친다. 그리고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어낸다.

 

 

 

 

 

연극의 소재는 두개다 . '반공''친일' 반공의 이념아래 갇혀 지낸 두열의 가족과 친일의 행적이 남아 있는 박암의 가족들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지배와 피지배 양상을 상당히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지하실의 썩은 냄새가 의미하는 각각의 더러운 앙금들- 그것에 접한 다양한 인간 군상을 재치 있게 표현한 점이다. 연극이 막바지로 흐를 때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 '착하게 사는 건 뭘까?' 때로는 불의도 감싸 안아주고 포용해야한다는 막연한 생각은 '위선'적인 사람만 세상에 남기게 되어, 착한사람과 착하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여 - (그 시대의 기준만으로) 착하지 못하다고 평가되는 사람들의 숨통을 옥죄는 것이 아닐까. 불의에게도 '관용'이 필요한가? 아니, 그 이전에 불의와 정의의 기준은 무엇인가? 두열과 박암처럼 그 시대의 정의와 불의의 접면(layer)에 있는 사람들은 일단 제외 하더라도, 그 주변부에서 ''을 이어가야 했던 인간들에게도 그러한 불의와 정의의 옷을 입혀 주어야 할까? 먹고 살만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기에 먹고 살 수 있었다'는 변명을 자주 하는 지도 모른다. 정말 우리가 먹고 살만하지 않다면 '각자'는 먹고사는 편에 속할 것인지 먹고살지 못하더라도 소신을 지키는 편에 속할 것인지 '분명하게' 결정해야 하거나 '쫓기듯' 죽어야 한다. 먹고살만하지 않은 상황에서 '먹고사는 사람', 먹고살지 못하더라도 소신을 지키는 사람에게 '동정'또는 '핍박'을 가한다. 가장 큰 슬픔은 현재가 평가하는- '불의'의 이데올로그의 분신들- '두열과 박암'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끌려 다니는 주변인들의 삶이다. 개개인의 실제와 현실의 역사로서 - '그래도 먹고사는 사람'이던 '소신을 지키는 사람'이던 간에 말이다. 어차피 '정의'의 가치란 어디에도 없었다. 있다하더라도 '선의'의 탈을 쓰고 바뀌어 왔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특히나 홍수처럼 쏟아지는 '산개되고 부분적인' 정보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요즘에는 더욱더. 단지 가치가 있었다면,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는 개개인의 존재와 그 판단의 두루뭉술한 터울에서 살아갔던 개인들에게만 가치 있을 뿐이다. 정의의 표준은 변화해 왔지만, 개개인은 결코 정의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바쁜 일상에 묻혀서, 나를 바라보는 가족과 동료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혹은 막연히 남 눈치 때문에- 정의와 불의라고 평가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을 잇는 우리들은 - 세상의 역사에 누구보다 직접적으로 직면한 가장 슬픈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때의 불의'에 맞서는 그들은? 언젠가 '그때의 지금'을 울면서 이어갔던 사람들 보다 '지금' 더욱 크게 울지 않는가. 억지로 눈물을 참아가며 '그때의 지금'을 살았어도, '미래의 현재'에는 그 참은 눈물만큼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던가. 자기 자신의 변절을 바라보는 인간은 얼마나 슬플까. 그것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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