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무대는 철제 접는 사다리 세 개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교탁 세 개를 각기 올려놓고, 장면변화에 따라 철제 사다리를 세우고 그 위에 올라가 앉는다. 탁자위에 트렁크와 필수품을 올려놓기도 하고 그 위에 눕기도 한다. 사각의 옷걸이 틀을 차단막처럼 이동시키며 장면전환에 대처한다. 러시아 민요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고 배경 막에 투사된 별빛이 빛나는 밤하늘의 영상은 극 분위기 상승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극의 배경이다. 바이칼 호를 보기 위해 생전 처음 한국을 떠난 윤경은 딸에게 줄 마트료시카를 품에 안고 이르쿠츠크로 향한다. 낯선 언어, 낯선 환경 속에서 70시간이 넘는 시간을 보내게 된 윤경은 열차 안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 고향을 찾아 나선 고려인 4세 아델리아와 돈을 벌기 위해 러시아에 살던 우즈벡 딜퓨자, 아즈카. 죽은 남편을 떠나 온 나쟈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열차에 몸을 맡긴 채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면서 내용전개가 된다. 관객은 함께 여행을 하는 느낌으로 극적 분위기가 형성되는 연출가의 기량이 발휘된 연극이다.

심사평 “절제된 서사 통한 내적 서사 추구, 신춘문예 정신에 부합”
희곡의 경우 올해는 근래의 응모 편수 보다 거의 2배에 가까운 150편이 접수된 까닭에 심사위원들이 힘들기도 했지만 힘든 만큼 아주 즐겁기도 한 심사였다. 지속적으로 줄어만 가던 희곡 부문의 응모 편수가 다시 늘어났다는 것은 우리 연극의 생태계가 다시 활력을 찾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몇 차례의 논의 끝에 150편의 희곡들 중에서 최종 심의에 오른 희곡은 이소연의 ‘마트료시카’, 김진희의 ‘한낮의 유령’, 채승철의 ‘제목이라도, 비바! 골든 제너레이션’ 그리고 장보람의 ‘아들의 초상’ 이렇게 4편이었다.
‘마트료시카’는 묘한 매력을 가진 작품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는 주인공과 그 열차의 같은 칸에 스치듯 머물렀다 지나치는 이국 사람들의 모습과 관계를 통해 별다른 극적 사건 없이 자아와 가족에 대한 성찰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과 필력에 호감이 갔다. ‘한낮의 유령’은 노인들이 모여 하루를 지내는 -아마도 탑골공원 같은- 한 공간에서 사라짐과 기다림의 교차를 통해 우리시대의 소외된 계층과 소통이 끊긴 세대의 모습을 연극적으로 구축한 점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제목이라도, 비바! 골든 제너레이션’은 삼포 또는 오포 세대라 불리는 슬픈 우리 청년층의 현실을 현대적이면서도 해학과 익살이라는 전통기법을 적절히 버무려 꽤 훌륭한 너스레로 풀어낸 점이 눈길을 끌었다. ‘아들의 초상’은 신춘문예 공모에서 기대하기 힘든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구성과 절제된 상황과 캐릭터의 표현이 주목 받았다.
네 작품을 놓고 열띤 논의 끝에 ‘마트료시카’와 ‘아들의 초상’이 끝까지 언급되었고 매끈하고 깔끔하지만 이미 익숙한 느낌의 ‘아들의 초상’ 보다는 비어있음을 통한 채움을, 절제된 서사를 통해 내적인 서사를 추구한 ‘마트료시카’가 신춘문예의 정신에 더 부합된다고 심사위원들이 의견을 모아 당선작을 결정했다. 당선된 이소연 작가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며 최종 논의에 오른 다른 세 분도 멋진 작가로 성장할 역량이 충분하기에 조만간 연극현장에서 멋진 작품으로 만날 날을 기다려본다. - 최용훈・문삼화 연극연출가

최용훈(왼쪽), 문삼화 연극연출가
당선 소감 - 이소연
12월을 제일 사랑합니다. 생일도 있고, 크리스마스도 있고. 함박눈과 선물상자, 캐롤도 좋다고. 아주 어릴 때부터 말했습니다. 올해 생일 케이크를 다 먹기도 전에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쩐지 그 때의 나보다 지인들 얼굴이 더 선명합니다. 나보다 더 크게 놀라고 붉어지던 그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위태로운 딸의 미래를 한 발 먼저 믿어주던 우리 엄마, 그리고 아빠. 맛있는 건 제일 많이 먹는 누나 밑에서도 덤덤한 우리 형은이, 형민이. 열한 살 때부터 꾸준히 나를 지켜주는 지선이. 승환이, 광균이. 변사체 동인 친구들, 재현, 효진과 사랑해 마지않는 진희. 소울메이트 진주.(소연 없는 소연축하주 마셔줘서 고맙다) 왜인지 아직까지도 술 마실 때 끼워주는 동국대 후배들. 연극원에서 언제나 함께하는 유쾌한 언니, 오빠들.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선생님들께도 꼭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믿어주고 끌어주고 토닥여 준 권두현 선생님. 진심으로 고마워요.
‘마트료시카’의 주인공 윤경은 우리 엄마의 이름입니다. 엄마가 엄마의 이름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쓴 모든 희곡의 인물들은 모두 어떤 이의 이름을 빌려온 것 같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사람들.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 열심히 나를 스쳐간 사람들. 혹은 머물러준 사람들. 그들에게 감사를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 무엇보다 기쁩니다. 나에게 사람이 없다면 나는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싶다던 나의 바람은 여전합니다. 겸손하고 야무지게, 계속 쓰겠습니다.

이소연
1992년 경기 파주 출생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전문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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