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오태석 '한만선'

clint 2017. 12. 8. 15:25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저격을 이렇게 극화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충격을 받는다. ‘이렇게’라는 말은 안중근의 과거에다 오늘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교묘히 연결시킴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단순한 리얼리즘으로 가져가지 않고 현대 상황의 맥락에서 접목시킨 수법을 말한다. 작가이자 동시에 연출을 맡았던 오태석의 리얼리즘은 상식적인 리얼리즘이 아니다. 그렇다고 전위적인 실험도 아니고 해서 그에게 싹트고 있는 새로운 형식에의 추구가 이 작품에서도 계속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한만록>은 단순히 만주를 넘나들며 이등을 총살하는 안의사의 행적만이 아니라 그 과거의 역사에 곁들여 일제 크레인에 치인 인부의 이야기와 그런 기기를 굴려서 먹고 사는 영세자본가의 생활을 에피소드로 ‘제시’함으로써 역사와 대비되는 일상, 영웅의사와 대비되는 소시민의 모습으로 우리를 얼떨떨하게 만든다. 오태석의 작품이 대개 충격에다 우리를 얼떨떨하게 만드는 요소로써 우리를 매료시킨다면 역설적인 표현이 되겠지만 실상 그런 것이 없다면 그도 일반작가와 다를 바가 없다. 어떤 충격을 줄 것인가, 그리고 어떤 착상과 전개로 우리를 얼떨떨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기대가 없으면 그의 매력도 반감될 것이다. 그는 부단히 성장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그의 충격은 의표를 찌른다. 그래서 우리는 오태석의 세계를 참신하다고 느낀다. 이번 작품도 참신했다. 무대도 전후좌우 상하로 잘 구분되어 있고, 연출적으로도 적절히 활용되었으며 특히 열차의 발착과 그 통과를 감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발상법은 일품이었다. 그러나 과거와 현대의 병행에 인과관계를 가지고 서로 맞물려 있었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오태석의 ‘카오스의 미학’은 어쩌면 일종의 분파에 지날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생긴다. 적어도 안중근 의사의 과거 사이에 비집고 들어오는 현대의 때묻은 일상성이 과거의 사건과 맥락을 같이하지 않거나 서로 연관되어 있지 않으면 단순한 구성이 되어 버리고, 생경한 서로의 이질성으로 해서 두 이야기는 서로 교차되어 혼란으로 치닫는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두 이야기가 어떤 맥락으로 연결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반일이라거나 침략이라거나 적어도 죽음이라는 선에서라도 합일로 완결지어져야만 그 구성은 완벽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점에 있어서 깊이 천착되지 않고 손쉽게 두 이야기를 과거와 현대의 사건으로 병행시키기만 해서 참신한 충격은 주지만 깊이 있는 충격까지 끌어내지 못한다. 병행의 수법은 과거와 현대만이 아니라도 이등 저격과 같은 혁명의 대의명분과 일상성의 잡다한 세속성이 나란히 설 수도 있고, 정치적 침략과 경제적인 그것이 병립적으로 보여질 수도 있으며 특히 안중근의 총살과 종교적 계율 사이의 갈등으로 더 치열한 드라마가 탄생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것이 전혀 상관없는 크레인 사고와 인부의 죽음과 책임자의 책임기피 및 그의 무책임한 삶의 단면의 제시로 끝나게 되니까 일상의 부박함이 들어 장중한 역사적 인물의 의식을 욕되게 한다. 물론 작가의 의도는 그로써 오히려 일상의 부박함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려는 것이 될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영웅적인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반영웅주의를 감출 수도 있다. 그 어느 것이거나 작가의 의도는 완벽한 형상화에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이 병행의 연극은 카오스 상태에서 끝난다. 그러나 이 카오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즐거움의 카오스이다. 우리는 충분히 이 작품이 지닌 시각적인 이미지의 조성에 빠질 수 있다. 연극을 줄거리만 따라가던 버릇에서 벗어나 ‘장면’마다 형상 자체에서 강한 이미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이 무대 뒷면 깊숙이 가로질러 달리는 열차, 뻐꾸기 웃음소리인지 기적소리인지 분간되지 않는 토속적인 음향, 기모노를 입은 채 죽어 간 이등 등으로 전달된다.

 

 

<한만선>은 도시민의 소시민성과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속물근성을 비판한다. 공사 책임자인 상노가 겪는 여러 가지 일들은 특별히 시선을 주목할만한 특종 뉴스가 아니다. 신문의 사회면에서 조그맣게 다뤄지거나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일상의 사건들이다. 작가는 일상의 풍경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인간의 비정한 속물주의를 읽어낸다. 평온하기만한 우리의 일상을 돋보기로 관찰하여 타락의 이물질들을 발견한다. 사고 현장에서 포크레인 기사는 책임을 회피하고 달아나 종적을 감추었고 아이가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는데도 공사장 인부는 죽고 사는 것을 팔자소관으로 돌린다. 걸레 제조업 사장인 친구 우식은 경영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일본에서 만든 주름제거기를 수입하여 피부를 20년이나 젊게 해준다는 허위 광고로 돈을 벌려고 한다. 도시인 일상의 이면에는 부도덕한 양심과 인명 경시와 사기행각과 물신주의가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여기서 작가의 예리한 관찰력이 빛난다.

 

 


이 작품에서 일상의 비속한 속물주의는 장부(丈夫) 의식과 대비된다. 장부 의식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상노를 가르쳤던 옛 선생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각 장면마다 ‘수기’(手記)로 나타나는 안중근 의사의 행적이다. 선생은 즐거운 과학을 목표로 17년 동안 목마를 설계하였으나 내장 부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상품화의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상노가 어렸을 때 “장부 출가 생불환, 조문도면 석사가의, 보이스 비 엠비셔스”의 교훈을 가르쳤던 스승이다. 이 작품의 극중 현실에 일제 강점기 안중근의 행적이 수기로 나타난다는 것은 겉보기에 생뚱맞지만 장부 의식의 측면에서 상통한다. 그러나 도시인은 장부와 같은 기개와 의지, 구도의 신념, 원대한 야망은 사라졌고 소인배처럼 살아간다. 소인배의 삶을 부추기는 것은 비단 개인의 인격과 신념만의 문제가 아니다. 상노가 들린 나이트클럽, 호객하는 노파, 피학을 요구하는 가학적 놀이기구는 성을 담보로 매매되고 상품화되는 물신주의의 우울한 풍경들이다. 이 타락한 풍경 속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도시인의 자화상이 담겨 있다. 상노의 스승이 뒤늦게나마 상노 처의 도움을 받아 특허권을 이전하려 했을 때 상노가 완강히 반대하며 화를 내는 까닭은 장부의 삶을 포기하고 현실에 타협하려는 스승의 비굴한 모습 때문이다. 상노의 분노는 도시인의 속물주의에 대한 환멸로 드러나지만 그것은 반대로 자신에 대한 환멸이기도 하다.
극의 처음과 끝에 배치된 자전거와 시속계와 철도 건널목의 황색 안전등은 이 작품이 창작된 1980년대 산업사회의 음울한 풍경을 상징한다. 상노는 고정된 자전거 폐달을 신나게 밟고 시속계는 붉게 달아오르며 철도 건널목의 황색 안전등은 깜박인다. 뚜렷한 목표 없이 반복되는 질주와 속도계와 안전등으로 대표되는 산업사회의 이미지는 문명의 발전만큼이나 반비례하여 허무와 불안과 위기를 경고한다.

 

 

공연 당시의 작가 오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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