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안톤 체홉 '카멜레온'

clint 2016. 11. 8. 21:07

 

 

 

 

 

체홉 초기 단편의 묘미는 무엇보다도 유쾌한 문체와 풍자, 그속의 날카로운 지적들이다
길거리에서 맹구역할을 해주는 우리의 오츄멜로프를 지칭하는 제목 ' 카멜레온 '은
그가 처한 상황과 그에 반응하는 오츄멜로프의 간사함에는 과분할정도로 격조 있는 표현이다. 카멜레온의 동물적 자기보호본능은 후루킨에 대응한 오츄멜로프의 지극히 이성적인 책략(!)과는 분명다르다.

 

 

 

 

부잣집개는 ' 견공 ' 길거리개는 ' 개새끼 ' 등호 법칙이 최근이라고 바뀐 것은 없지만 체홉이 살아 숨쉬던 그때

후루킨을 물어버린 망나니 개는 권력의 막강한 배경에 힘입어 멍청한 오츄멜로프로부터 무사 탈출한다.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작품임이 분명하다

 

 

 

 

작가소개
Anton Pavlovich Chekhov(1860-1904)--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안톤 체홉은 러시아의 상업 도시인 타간로그(Taganrog)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돈으로 자유를 산 농노였고 아버지는 가난한 상인이었는데, 아버지가 투자를 잘못하는 바람에 집안이 파산을 하게 된다. 결국 체홉의 가족들은 집과 가게를 팔고 모스크바로 이사를 가고, 체홉만이 공부를 끝마치기 위해서 고향에 남는다. 체홉은 이 기간 동안 가정 교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데, 이 시기가 그의 인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체홉은 고향에서 공부를 마치고, 1879년에 장학금을 받고 모스크바 의과 대학에 들어 가는데, 그의 아버지가 집안을 책임지기에는 너무 무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체홉이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족과 자신의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공부하는 틈을 타서 짧은 유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때마침 러시아 사회에서는 지식인들에 의한 여러차례의 ?브나로드? 운동이 당국의 탄압과 민중인 농민들의 보수성 때문에 실패하는 바람에 좌절감과 위축된 분위기에 휩싸였는데 그 분위기를 타고 저속한 유머 주간지나 신문이 유행하고 있었다. 젊은 체홉은 그러한 주간지와 신문의 투고란에 착안을 했던 것이다.
의학부를 졸업하고 모스크바와 모스크바 근교에서 의사로서 일하던 체홉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한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작가 드미트리 그리고로비치(Dmitri Grigorovich)가 그에게 보낸 편지였다. 재능을 낭비하지 말라는 충고를 담은 그의 편지에 감동한 체홉은 작가로서의 자각을 새로이 하여 그의 첫 희곡 Ivanov(1887)과 여러 소설 작품을 썼다.
체홉은 처음에 현실 문제로서 가족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단편을 썼기때문에 자신의 사상을 작품에 심도깊게 표현할 겨를이 없었다. 설령 초기 단편 중에 사회 비판적인 작품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허무를 증오하는 성실하고 인간적인 그의 인품에서 우러난 작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시작했던 글쓰는 일이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는 작가로서 책임감을 갖게 된다. 결국 이러한 환경과 의사가 된 후에 많은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이 그의 작품의 성격을 결정지었다고 할 수 있다. 체홉 자신이 원래 가난한 농노의 후예로서 고학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계급사회에서 무지하고 가난한 채로 억눌려 내버려진 하층민들에게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었고, 그들의 현실적인 삶을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그들을 억압하는 힘, 즉 관리들, 지주들에 대한 분노와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그의 작품을 통해서 시종일관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체홉은 사소한 사건이나 삶의 단편들을 통해 굴절된 성격의 인간들,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결여된 인간들과 그 속에서 어질고 약한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을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사회개혁이 일어나고 있던 시대에 산 작가로서 체홉의 작품에는 사회상과 관련된 강한 의도와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혁명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로의 점진적인 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인 변모를 위해 필요했던 것은 지식인의 노력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래로 폐결핵 증상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체홉은 1890년에 죄수들의 유형지인 사할린으로 가서 석달간 체류한다. 정신적 정체의 해소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제정 러시아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사할린 여행에서 돌아온 후 집필한 사할린 섬(Sakhhalin, 1893)에서 보여주듯이 그가 온 정력을 기울여서 암흑 속에 폐쇄되어 있던 벽지의 유형 제도에 과학적 조명을 시도했던 사실, 또 사할린의 비참한 현실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그가 한때 공감했던 기독교적 사랑과 악에 대한 무저항을 주장하는 톨스토이즘이나 그 밖의 인도주의적 철학이 러시아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공허함을 느끼고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러시아의 현실 개혁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 지식에 대해 크게 염증을 느끼고, 톨스토이즘과 금욕적이고 자폐증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기 위해 인간성 해방에 눈을 돌렸다.
사할린 여행으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1892년에 멜리호보(Melikhove) 마을로 옮겨와 계속해서 창작활동을 함으로써 원숙기를 맞이했다. 한편 사회인으로서 활동도 활발하여 농민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기도 하고, 기근과 콜레라 예방에 협력하기도 했다. 그 밖에 학교 건립, 교량 및 도로 건설 등의 사회 사업에도 힘쓰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4대 희곡의 하나인 The Sea Gull(1896)이 상연되었을 때 전레에 볼 수 없으리만큼 심한 혹평을 받았고 실패로 끝났다. 그 이유는 그 당시의 희곡이 멜로드라마적인 요소와 극적 사건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체홉의 작품은 분위기(mood)와 대화가 극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홉은 그 충격으로 희곡을 쓰는 것을 그만 두고 다시 단편 소설을 쓰게 된다. 소설가로서 체홉은 희곡에서 표현할 수 없는 정교한 문체로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고 있지만, 한 두명의 주인공 외에는 인물들을 자세히 묘사할 수 없는 소설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단지 종이 위에 정교한 묘사를 통해서만 자신의 메시지를 표현해야 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그는 등장인물 모두에게 똑같은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고, 배우들의 제스쳐와 목소리의 억양과 어조(tone)를 통해 직접적으로 작품의 메시를 전달함으로써 관객들과 함께 즉각적으로 정서적 교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희곡의 장점을 깨닫고,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다시 극작품을 쓰는데 열중하고,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여 The Sea Gull을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양해 아래 다시 상연하여 선구적 근대 연극의 무대화에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한 모스크바 예술 극장과의 유대와 톨스토이 및 고리키와의 교재가 체홉의 생활을 밝게 해 주었다 (톨스토이즘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인간및 예술가로서의 톨스토이에 대해서는 그는 평생 변함없는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1901년 5월, 체홉은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여배우 올가 네오나르도브나 크니페르(Olga Knipper)와 결혼했다. 그리고 3년 뒤에 독일의 요양지 바덴바덴에서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