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최명숙 '처음해본 이야기'

clint 2016. 11. 8. 18:07

 

 

 

 

사과.

오랜만에 여자가 남자의 방을 불쑥 찾아온 날. 남자는 사과를 쪼개 여자에게 준다.

여자는 사과를 받아먹는다. 남자는 여자를 놀랍게 쳐다본다.

여자가 남자의 방에서 무언가를 먹은 게 처음이기 때문이다.

늘 그래왔듯이 남자의 옷을 벗기려는 여자에게 남자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남자 : 오늘은 이야기를 하면 안 될까요?

 

불장난.

어렵게 시작된 이야기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남자 : 사랑한다니까요?

여자 : 머리가 나쁘시군요. 사랑이 아니라니까요?

불장난일까? 사랑일까?

연애의 마지막 단계, 그거 해보면 알게 된다는데...

 

엉덩이.

남자 : 그럼 엉덩이를 보고 싶어 하는 건 괜찮죠?

사랑이 너무 어렵다면 엉덩이는 좀 덜 어려울 것 같았는데, 이야기는 점점 더 꼬여만 간다.

여자 : 내가 엉덩이를 정말 싫어하는 건, 그 얘기를 할 때 눈물이 나려고 했기 때문이에요.

엉덩이 얘기에 눈물이라... 도대체 왜?

마리, 군만두, 그리고 이불.

이해할 수 없는,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은, 그리고 왠지 슬프고 왠지 웃긴, 왠지 덜 떨어진 것 같은... 두 사람의 지난 일들.

 

눈물.

여자의 눈물이 뭔지 알아버린 남자. 비밀을 들켜버린 여자는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까?

 

사랑은 포장되어 있다. 여기저기에 숱하게. 달콤한 노래, 잔잔한 시, 환상적인 그림, 알콩달콩 연속극, 격정적인 영화, 장엄한 오페라...

그런데 그 포장을 하나하나 다 벗겨내면 무엇이 나올까? 사랑의 알맹이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이 알고 싶어서, 무대 위에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을 남겨 놓았다.

비밀, 음모, 배신, 운명... 이런 것은 없다. 그냥 남자, 그리고 그냥 여자일 뿐.

남자는 간절하게 사랑을 원하고 여자도 간절하게 사랑을 원한다.

그런데 둘은 참 어렵다. 이제까지 숱하게 만났으면서도 한 번도 이야기를 해 본적이 없단다.

 

 

 

 

 

코믹과 진지함을 잘 배합하여 무대 한쪽에선 기타와 독백의 나레이션을, 중앙에선 남녀 배우의 과거와 현재의 두 시점을 넘나드는 스토리 전개의 구성으로 진정한 사랑에 관한 대화를 보여줬다. 시작부터 색다른 남녀관계의 상황을 보여주며, 그들의 사랑에 관한 전혀 다른 시각차를 맛갈나고, 강력한 대사를 통해 그려가는데, 늘 고민하고 선택해야 하는 남녀의 진실과, 감정의 변화와, 슬픈 상처들과, 운명에 관해 관객들에게 큰 사랑의 화두를 던져 준다. 과거의 상처를 지울 수 없어 이성적으로 완고한 방어벽을 둘러버린 여자와 사랑을 감정으로 풀어보려는 남자. 사랑에 대해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고, 평행선으로 치달을 것만 같은 상황들을 강약 조절의 세련된 극적 연출로 긴장감을 더하며 서서히 풀어가는데, 남녀 둘의 대화와 마음속의 진실의 소리를 스스로 깨닫는 과정을 실감난 연기로 잘 표현했다. 사랑의 고통을 말하면서도 결국엔 사랑의 진실에 이름을 보여주는 이 연극은 섬세하고 감각적인 대사와 표현으로 다양한 맛의 재미를 주었다.

"진정한 사랑은 두려워 말아야지요. 이번이 진짜인지도 모르니까요" 남자의 대사와 같이 사랑은 미리 단정하거나, 결과만을 따져 육체적 욕망으로 해결하면 끝일 거라는 오해로 포기해서는 안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많은 젊은 사람들의 일회용 가짜 사랑에 치이고, 억울하게 넘어진 영혼마져 피폐해진 여성이라면, 극에서의 여자같은 두꺼운 불신의 갑옷을 입을 수도 있겠지.

단계가 뒤죽박죽이 되어도 사랑은 결국 사랑으로 남게 된다는 결론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최명숙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졸업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대학원 졸업

극작) 2004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두 아이>, 뮤지컬 <소나기>, 2005 <표현의 자유>, 뮤지컬 <세익스피어의 여인들>

연기) 1997 <날 보러와요>, 1998 <택시드리벌>, 2004 <굿킬>

작곡) 뮤지컬 <세익스피어의 여인들>, 퍼포먼스 <인생은 아름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