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페르난도 아라발 '바벨탑'

clint 2016. 7. 14. 17:30

 

 

 

 

 

 

작품 평.

 

바벨 탑은 아라발이라는 작가를 사로잡고 있는 강박관념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죽음과 사랑, 성적 폭력, 배신과 추방, 조국 스페인, 환상적이며 종교적인 기상천외한 일들을 명백한 상징주의 적 허구를 통해 시()와 현실이 결합된 새로운 종합의 형태로 보여준다. (흰개미들이 감아먹은 성()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지금의 스페인이 아니겠는가?)

 

지난 번 희곡, 유령 기차의 발라드의 끈질긴 주제였던 추방이 여기서 다시 나타난다. 라띠디아는 눈이 멀게 되어, 자신의 낡은 저태에 피신하여, 스페인 황금시대의 영웅적이었던 과거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억지로 주장된)로 회귀하여 외롭게 살고 있다. 아직은 외국에 팔리지 않은 영광된 조국, 후이 블라스가 이미 경멸했던 청렴한 대신들에 의해 썩어빠진 스페인이 아니겠는가. 돈키호테의 여자 화신인 라띠디아는 어쨌든 기사도적 명예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명예를 잃어버리게 된 이유를 찾으려고 애를 쓴다. 라띠디아의 꿈을 나눠 갖는 척하면서 등쳐먹으려고 그녀의 순진함과 환상적 이상주의를 이용하려 드는 사교적이지 못한 소외자들과 악당들한테 둘러싸여 배신당하고, 돈의 힘을 아는 귀족들한테 그렇듯 말려들고 만다. 인정 없는 백작부부의 미끼에 걸려 든 돈키호테와 똑같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귀족 계급이 고상한 대의명분을 들던 시대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아라발이 자주 쓰는 또 다른 주제로는 배신이 있다. 주위 사람들과 측근 (마레다)의 배신, 스페인에 대한 배반이다.

관객은 가장 저속한 열정의 파도에 출렁거리며 폭음, 폭식, 나태, 파렴치, 난폭한 성적 굴종, 에로티시즘이 판을 치는 지옥으로 내려가도록 강요당한다. 타락해버린 위대한 스페인이라는 시체 위에서 번식하는 악당의 세계를 상기시킨다. 화려한 무대와는 거리가 멀다. 거지, 도둑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는 셀레스틴 (가톨릭수도회) , 다른 한쪽에는 돈키호테가 있는 그리하여 숭고함이 비열과 맞붙어 있다. 라띠디아는 고백 못할 열정들이 들끓는 가운데 꿈의 마력, 요정 이야기의 신비로움으로, 목가적인 사랑의 대위법으로 화성의 당나귀한테 반한다. 두 개의 상징적 얼굴을 한 이 동물은 이교도적이면서 호색 적이고 복음주의적이면서도 부드러운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지옥으로 내려간 등장인물들이

부패의 밑바닥에까지 이르자 작가는 돌연 타락의 진열장을 완전히 거꾸로 펼쳐 놓는다.

 

 

 

빛을 향한 상승이 공포로 이어질지라도 인간들이 쾌락의 정원에까지 들어가기를 열망하는 것은 가장 음침한 비열의 밑바닥에 희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낡은 유물의 퇴색한 황금빛, 우롱당한 스페인의 영웅(돈 후안, 엘시드, 쉬메네)의 위대한 신화, 스페인에서 가장 뛰어난 아들(세르반테스, 성녀 데레사) 그리고 그들의 손자(사빠따, 체 게바라)들은 괴상한 짓거리들을 그만두고 자신들이 잃어버린 순수함을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려 한다.

신분 상승을 하고 싶어 버둥거리는 악당들로 인해 조롱과 풍자가 서사시를 방불케 한다.

 

아라발은 돈 후안으로 연극 속의 연극이라는 형식을 취하며 - 훌륭한 바로크적 주제 - 여기서 대단히 정화적인 힘을, 인간의 마음을 깨끗하게 바꿔놓을 수 있는 힘을 극적 환상과 대비시켜 놓고 있는 듯하다. 명백한 허구, 정치적 풍자, 신화가 희망의 외침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바벨탑의 재현으로 바뀐다. 신의 노여움으로 인해 전지전능을 드높이게 된 혼돈의 상징으로서의 바벨탑은 결합의 상징으로 바뀐다. ‘혼돈의 의식을 거행하는공황의

창조자인 아라발이 우리에게 남겨 주는 최후의 경이로움이다.

바벨 탑은 상상력에 의해 다양한 암시의 강력함으로 인해 정치적 고발 연극이 되게 한 힘의 탑(짓궂은 말이 아니라)이 된 것이다. ‘마술적 리얼리즘 realisme magique’의 좋은 본보기가 아니겠는가?

 

 - 도미니끄 쩨르뱅 Dominique Serv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