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개의 자동차(1,2,3,4,5)와 무대 오른쪽의 또 다른 자동차(A)가 무대 위에 등장한다. 이 자동차들에는 기숙하는 인물들이 있고 그래서 모든 자동차들의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다. 자동차 A에는 이 다른 자동차들의 시중을 드는 밀러와 그의 아내 딜라가 있다. 다섯 대의 자동차에는 각각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자동차 안에만 들어있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로만 말을 한다. 자동차 A의 밀러와 딜라는 이들의 시중을 드는데 종종 딜라는 이들의 성적인 요구들 들어주고 이들의 똥오줌도 받아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좀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두 명의 조깅하는 남녀가 등장한다. 이들은 극이 진행되는 동안 몇 차례식 무대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뛰는 연습을 한다. 이들은 매우 지친 것 같지만 계속해서 뛴다. 이들과는 또 다른 무리로 음악은 연주하는 세 명의 악기 연주자들이 있다. 이들 중의 한 명의 이름은 엠마누(트럼펫 연주자). 엠마누는 돈 없는 사람들이 마음껏 음악을 즐기고 춤추게 하기 위해서 집을 나왔다. 서른 세 살에. 그는 마굿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직업은 목수로 설정되어 예수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 무리 중에 하나는 토메(클라리넷 연주자), 그는 유다의 역할을 하게 된다. 나머지 하나인 훠매트는 섹소폰 연주자인데 벙어리이고 나중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로마병사들은 누구인가. 재미있게도 앞서 언급한 두 명의 조깅남녀인 따스까(중년의 부인)와 디오씨도(젊은 청년)가 로마병사들이다. 이들은 무대 위를 몇 번을 지나쳐가더니 곧 디오씨도가 따스까를 유혹하여 자동차A의 밀러에게 방을 달라고 하고 자동차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들은 극의 진행 중 경찰복을 입고 차에서 나와 엠마누를 쫓는다. 엠마누는 딜라와 꿈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는데 딜라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녀는 계속해서 주변인물들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모습이므로 더욱 그러하다. 결국 토메의 포옹으로 엠마누가 체포된다. 마지막엔 자동차에 타고 있었던 한 노인부부의 집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이 아이의 울음소리와 잡혀간 엠마누가 고문당해 신음하는 소리가 겹쳐진다. 다음날 아침, 다시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자동차 무덤의 하루가 시작된다. 딜라가 일어나 사람들을 깨우는 첫 장면과 같은 장면이 여기서 다시 반복된다

<자동차묘지>는 모든 것이 낯설다. 여기가 쓰레기장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만큼 지저분한 무대와 그에 걸맞게 정신없는 배우 들의 차림새, 락(Rock)콘서트에서나 들을 비트 강한 음악들. 극장 안으로 들어선 연극 관람객이 흔히 접하게 되는 레파토리는 아니다.<자동차묘지>의 자동차는 상식적으로 생각되는 힘있게 달리는 자동차의 일반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급변과 자극을 두려워하는 자동차묘지의 사람들에게 자동차의 원래 기능 은 필요하지 않다. 이동 수단의 의미를 상실한 쓸모 없는 고철 덩어리는 원래의 기능과 전혀 반대의 움직일 수 없는 '집'이라는 고정된 공간,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제 오히려 사람들은 자동차 안을 벗어나야만 이동이 가능하다.
자동차가 없는 무대 안의 십자 모양의 길은 등장인물 모두에게 공통이며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다. 십자가 이외의 부분인 자동차 안에서 그들은 거주한다. 바로 이곳에서 사람들의 계급이 구별된다. 십자가 오른쪽 아래 부분은 하류층인 하인(밀로 분)과 창녀(딜라 분)의 자동차 집이고, 자동차가 없는 왼쪽 아래 부분은 락커들(엠마누, 또빼, 훼데르 분)의 공간이다. 그리고 십자가 위 부분에는 밀로와 딜라의 수발을 받으며 '자동차 안의 사람들'이 산다. 이 공간에 거주하는 상류층의 사람들은 마치 움직이지 않는 안정된 상태를 바라는 집권자들 처럼 이동하지 않고 자동차 밖으로도 나오지 않는다. 하인 밀로 역시 자동차 안의 사람들의 공간 안으로는 감히 들어가지 못한다. 락커들은 자동차 사람들의 공간뿐 아니라 하인의 자동차 안으로도 들어가지 못한다. 언제나 달려야 하는 이상한 커플인 라스까와 띠오시또는 이유 없이 자동차 둘레를 뛰어 다닌다. 그러나 이들이 자동차 안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 날부터 이들에게 경찰이라는 신분이 주어진다. 이제 이들이 뛰는 이유에는 엠마누를 잡아야 한다는 목적이 주어진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하위계층인 창녀 딜라는 어느 공간에서도 제한 받지 않는다. 그녀는 무대의 어떠한 곳이든 휘집고 다닐 수 있다. 이 재미있는 인물 딜라는 여러 가지로 특이하다. 그녀는 가장 더럽고 천하고 제한 받을 수 있는 인물이며 동시에 가장 자유롭고 순수하며 성스럽다. 그녀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전부를 준다. 딜라와 공생 관계에 있는 밀로는 우직하다. 그는 딜라와 함께 이 '부끄럼 많고 예민한 자동차사람들'에게 무조건 봉사한다. 식사를 챙겨주는 일에서 오물을 받아내는 일까지 세세한 일 모두를 책임진다. 신분이 가장 고귀한 사람들은 가장 미천한 사람들의 도움에 의지하며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받는 이들은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반대로 이 고마운 이들은 고마워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매번 고맙다고 말한다. 더불어 밀로는 자동차 안의 사람들에게 연신 굽신거리며 쩔쩔 매기까지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딜라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화를 내고 싶을 때 화를 낸다. 화를 내는 대상이 밀로 뿐만 아니라 자동차 안의 사람들에게도 확장되어 있다. 그녀가 화를 낼 때는 분명하고 정당한 이유가 있다. 밀로가 지나친 속박을 주장할 때, 자동차 안의 사람들이 쑥덕대며 뒷말을 하거나 몰래 망원경으로 훔쳐볼 때이다. 딜라는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행위들 에 민감하다. 특히 소리에 민감한 딜라가 유일하게 자극 받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엠마누 밴드의 음악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음악'이 일단 연주되기 시작하면 신분의 귀천(歸天)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은 열광한다. 자동차 안의 사람들은 망원경으로 이들의 연주를 훔쳐보며, 앞만 보고 달리던 라스까와 띠오시또도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고, 심지어 밴드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경찰마저도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정작 이 음악이란 이 자동차묘지에서 금지이다. 계층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기쁨을 주며 전체에게 통일감을 형성하는 음악은 무대 위의 사람들에게 차이를 없애는 범죄로 취급되어 하대 받는다. 가장 밑바닥인 음악밴드들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면서도 멸시를 받는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자동차 안에 살지 않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이단(異端)이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이들은 집권층들에게 있어 몹시 위험한 존재이다. 착한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이단아들의 장(長) 엠마누는 마치 예수를 보는 듯하다. 그는 음악으로 사람들의 구원을 꾀하다가 친구 또빼의 배반으로 밀고를 당해 수레 위에서 십자가 모양으로 매달려 막달라 마리아 딜라의 품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엠마누 자신이 입버릇처럼 외우던 말처럼 착한 사람이 되려했던 그는 마지막에 죽음으로 영원의 평화를 잉태하게 된다. 무대 뒤에 켜지는 백(back)조명과 흘러나오는 찬송가는 엠마누의 죽음을 더 성스럽게 부각한다. 약은 인물 또빼는 자신이 살기 위해 경찰에게 돈을 받고 친구를 밀고하는 가장 현실적이며 이득에 밝다. 또빼는 마치 유다를 베껴놓은 인물 같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악인 또빼에게는 도무지 얄미운 감정이 들지 않는다. 엠마누를 신고한 뒤 현상금을 달라고 칭얼대는 모습이나 돈을 받은 뒤에 신나 하는 철모르는 어린애 같은 또빼는 오히려 가슴이 저린 슬픔을 가져다 준다. 또 얼핏 잘못 보면 예수 희생의 해적판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이 작품을 그렇지 않게 해주는 인물이 바로 또빼이다. 그는 극의 끝 부분에 가서 엠마누가 체포될 때 살기 위해 베이스 기타를 두고 도망가는 훼데르에 반해 버리고 도망갔던 드럼채를 다시 몰래 주워들고 사라진다. 또빼는 자신이 살기 위해 음악을 버린 것이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또빼는 다시 돌아와서 제2의 엠마누가 되어 음악으로 사람들의 구원을 꾀할 것인가? 엠마누의 죽음 이후에 다시 처음과 같게 시작되는 딜라의 기상 소리와 새로운 라스까·띠오시또 커플은 또빼의 행적과 맞물려 공연이 끝나 현실로 돌아온 뒤에도 관객에게 그 뒷이야기를 궁금해하게 만든다. 밴드가 연주하는 모습과 음향실 간의 큐를 맞추기 위해 사용한 유쾌한 눈속임, 밴드들의 연주하는 과장된 몸짓 등, 전반적으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줬던 재밌었던 내용에 비해 작품의 주제는 확연히 드러나지 못했던 것 같다. 비일상적이고 신기한 낯선 무대와 음악, 인물, 작품 안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들에 비해 현실적으로 사용된 어투들은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이질적인 느낌을 강하게 만들어 작품과 관객의 밀접함에 더욱 어려움을 주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엠마누와 또빼를 비롯한 몇몇의 인물들은 현실적인 느낌이 강한 나머지 작품의 비현실적인 부분과 상충되어 인물의 중요성에 비해 그 성격을 부각시키지 못한 것도 그 이유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반면에 딜라와 밀로, 그리고 라스까 역은 특징적인 캐릭터를 잡아 작품의 성격과 잘 어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으로 인한 이들 집단간의 독립성 때문에 서로의 합일이 어려웠던 점을 아쉬운 점으로 함께 꼽겠다. 갓난 아기의 젖병을 부탄가스로 대신하는 사회, 가게에서 훔친 복숭아조차 통조림으로 재생산된 뒤 먹어야 하는 죽어버린<자동차 묘지>의 사회. 전쟁 후 폐허 속 무질서 안의 질서로부터 튕겨져 나온 엠마누처럼, 울음을 그치기 위해 자신의 공간 자동차 밖에서 떨어져 나온 아기는 밀로가 부르는 새로운 버젼(virsion)의 '섬집아기'처럼, 목이 따질 당연한 운명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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