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하륜 '저포놀이'

clint 2016. 5. 31. 16:43

 

 

 

 

김시습의 금오신화 중 만복사저포기를 차용한 고전의 상호텍스트화를 적절히 차용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만복사저포기]는 단순한 인용의 차원이 아니라 작품전체의 흐름을 이해하는 예비적 지식에 해당할 정도로 비중이 매우크다. [만복사저포기]에서 양생은 곧 김시습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때, 단종 폐위 이후 거짓 미치광이로 세상을 방랑한 역사를 되돌아 본다면 광승이나 서생은 곧 김시습의 두 모습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종은 죽은 후에도 매월당을 그리워하자 2박3일 동안 여자로 살 수 있는 시간을 허락 받는다. 해골을 쓴 단종은 광승을 만나 저포놀이를 한다. 저포놀이에 이긴 해골은 어여쁜 낭자가 되어 서생 매월당을 만나고 그들은 항아와 이백이 되어 사랑을 나눈다. 낭자는 자신이 썼던 해골을 서생에 선물하고 서생은 비로소 죽음을 본다. 죽음을 본 서생에게 광승이 나타나고 광승과 서생이 한 몸임을 알게된다. 해골을 받아 쓴 서생이 죽음의 세계로 떠나게 되자, 해골은 단종의 모습으로 돌아가 삶을 살게된다.

 

 

 

 

<금오신화>는 조선조 초기에 천재적인 문인이며 단종폐위 후 은둔해서 일생을 야(野)에 묻혀 살다간 기인 매월당 김시습의 작품이다. 죽어 충절을 지킨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살아서 절개를 굽히지 않은 생육신(生六臣) 중에 한 사람으로 그가 중국의<전등신화>를 본따 지었다는 한문소설<금오신화>는 한국최초의 소설이라는 점과 함께 문학사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금오신화>는 모두 5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에서 이하륜 '저포놀이'는 첫 번째 얘기인 <만복사저포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이 작품은 작가 김시습의 현실적 상황을 <만복사저포기>의 양생의 환상적 상황에 겹쳐 그겹의 틈을 늘이고 있다. 이하륜은 작가의 상황과 소설의 상황을 겹치고 두 시간을 겹치고 한 인물의 현재와 과거, 또는 현재와 미래라는 두 시간을 겹치며 삶과 죽음이라는 두 공간을 겹치고 있다. 이렇게 겹쳐진 시간과 공간, 상황의 틈에서 한 인물은 두 사람이 되고 두 인물은 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 마저도 분명치 않다. 과연 광승과 서생은 김시습이었을까?  과연 해골의 여인은 단종이었을까? 그런 단정적인 질문과 하나뿐인 답은 이 겹침의 세계에서는 묻거나 답해질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이 겹의 틈에서 인물들은 자꾸자꾸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며 자신의 상황을 지켜나가려 한다. 그 틈으로 들어가기와 틈에서 나오, 그 틈을 엿보기가 바로 저포놀이의 공간이고 저포놀이의 놀이이다.

 

 

 

 


노총각 양서생과 왜구에게 죽은 남윤처녀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랑얘기이므로 공간사랑 여름기획인 추리괴기극 시리즈로 맞춰 만들 수 있는 바탕이 있는 소재였다. 공연의도가 분명치 않거나 잘못 짚어 빗나간 재료가 많이 등장하는 요즘 무대의 형편 속에서 일단 공연취지가 분명하게 드러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민예의 단원들이 공동구성하고 극작가 이하륜이 대표집필해서 손진책ㆍ강영걸 공동연출로 나온 이 무대는 많은 노력과 좋은 의도를 엿볼 수 있으면서도 성취감은 크게 느낄 수가 없었다. 이들은 이 작품을 단순히 죽은 처녀와 살아있는 선비의 사랑이라는 남녀간의 사랑으로서보다 폐위되고 죽어간 단종과 살아서 그 죽음을 보는 충절의 만남으로 확대시키려는 노력을 했다. 이점은 이 작품의 의도 속에서 가장 빛나는 요소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상당히 긴 어둠 속에서 처량하게 상두꾼소리가 들리고 그 어둠 속에서 인광을 발하는 처녀귀신의 해골탈이 모습을 드러내 한을 남기고 죽은 사연을 노래한다. 처녀의 노래는 처녀 자신의 노래라기보다 죽은 단종이 이 처녀의 몸을 빌려 들려주는 사연 같다. 죽은 처녀가 이틀밤 사흘낮의 말미를 받아 못다푼 한을 위해 이생으로 돌아와 광승의 힘으로 해골탈을 벗고 아리따운 처녀의 몸이 돼 서생과 사랑을 나누다, 다시 명부로 돌아가는 처녀의 뒷모습에서 서생과 광승은 함께 깨달음을 얻는다. 여기서 서생은 김시습이요, 광승은 매월당이라는 것으로 처리돼 둘이 곧 한 사람임을 나타내고 그 둘이 함께 단종을 부른다. 상여소리가 계속 들리고, 처녀의 한 어린 노래가 있고, 시적(詩的)으로 처리하려 애쓴 대사가 나오고, 해골탈 광승의 귀면탈 등이 보이고, 휘장에 비친 그림자가 이용되는 무대전개는 애써 시(詩)와 깊은 의미를 강조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맺힌 처녀귀신의 스산한 분위기가 두드러진 것도 아니고 휘장에 비친 그림자가 신비로운 것도 아니었으며 대사가 모두 시(詩)가 된 것도 아니었다. 소재선택, 인물설정, 구성에는 당연한 조건이 구비됐으면서도 별로 많은 것을 이뤄내지 못한 것은 대사의 어휘사용이 거칠고 대사의 의미를 너무 크게 확대해서 의지해 보려는 자세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속에서 민예의 연기자들은 기본적인 기량이 있음에도 그 표현이 다져지지 않는 좀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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