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한 사건에 대해 진술하는 남편과 아내의 엇갈린 입장과 관점이 유머와 진지함과 기묘함으로 뒤섞여진 채 훌라후프와 함께 돌아간다. 아내가 집에 들어 왔을 때, 거실에 누군가 묘한 자세로 쓰러져 죽어 있었다. 아내의 기억과 확신으로, 그리고 남편의 기억과 추체험으로 이 사건의 전말이 되짚어진다. 아내의 믿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남편의 사정은 다르다. 여자의 오해는 남자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우스꽝스러워서 연민조차 느끼게 만드는 이 남자는 지금 심각한 상황에 빠져있다. 그의 훌라후프는 흔들거리며 돈다. 위태롭게 돌아간다. 때로는 기묘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모든 상황과 행위들이, 공연이 끝나고 난 후 어느 사이 자기연민과 성찰의 계기로 전환되게 만드는 이 연극은 일상적 상황의 메타포를 통해 인간 삶에 내재된 폭력의 잠재성과 그 폭력을 대하는 우리의 이중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한다.
구성
아내 임현숙의 진술(1~5장)
1장 임현숙은 자신의 집 거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해 진술한다. 그녀는 남편의 살인혐의를 부인하며 술을 많이 먹는 것 빼고는 문제가 없는 남편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2장 임현숙의 집에 놀러온 고교동창 박조현은 남자들의 바람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임현숙에게 고준범의 외도 의혹을 강하게 제기한다.
3장 남편에게 전화를 건 임현숙의 남편의 애인과 통화하게 된다.
4장 임현숙은 배신감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고 되뇐다. 그녀의 훌라후프가 맹렬히 돌아간다.
5장 임현숙이 살인사건의 내막을 추리하여 진술을 정리한다.
남편 고준범의 진술(6장~13장)
6장 자신의 살인을 시인하며 고준범은 진술을 시작한다.
회사에서의 고준범은 평범하고 약간은 무능하다는 평을 받는 사람이다. 그런 고준범에게 한동안 뜸했던 아버지의 환영이 나타난다. 그는 요즘 깡패들에게 사기를 당해 300만원을 갚으라는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7장 고준범은 자존심 때문에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못 하고, 그런 그의 앞에 죽은 아버지가 다시 나타나 고준범을 괴롭힌다. 고준범은 아버지를 증오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8장 술집에서 고준범과 회사후배 오진수가 대화를 나눈다. 돈을 빌려주겠다는 오진수에게 고준범은 깡패들에게 사기를 당하던 날의 전말을 얘기해준다.
9장 술에 취한 채 룸살롱에 가서 술값 사기를 당해 300만원을 빚지게 된 일이 재연되고, 고준범은 오진수와 헤어져 만취 상태로 귀가한다.
10장 만취상태로 집에 들어오는 길에 고준범은 아리랑치기에게 당하고, 아리랑치기 소녀는 임현숙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자신이 고준범의 애인인 것처럼 통화를 한다. 집에 들어온 고준범 앞에 아버지가 다시 나타나고 고준범은 어린 시절에 겪은 폭력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다.
11장 깡패들이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한다. 그들은 고준범의 아내에 대해 얘기하면서 고준범을 협박한다. 고준범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간다.
12장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으로 생각하는 임현숙과 자존심 때문에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는 고준범은 소통의 통로를 찾지 못하고 충돌하게 되고, 결국 고준범은 아내에게 폭력을 사용한다. 임현숙은 친정으로 떠나게 된다.
13장 전화상의 아내는 이혼 담판을 지으러 집으러 오겠다고 한다. 깡패들이 집으로 올 시간이 다가오기에 고준범은 만류하지만 임현숙은 듣지 않는다. 초조함 속에 안절부절 못하는 고준범 앞에 아버지가 나타난다. 아버지는 월남전 때 살상을 하던 자신의 모습을 잔혹스러우면서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나도 할 수 있다’며 고준범은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그를 목 졸라 죽인다.
작가의 글
대본을 구상한 때는 뉴 밀레니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세기말의 불안감은 밀레니엄 버그의 모양으로 사람들 머릿속과 빌딩 사이를 스믈스믈 기어 다니더니 막상 새 태양이 떠오른 얼마 후엔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 새천년의 앞에는 인류 앞에 어떤 길이 놓이게 될지, 우리는 어떤 길을 놓아가야 할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텔레비전에 나와 저마다의 전망을 내놓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뉴욕의 한복판에서는 참혹한 테러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보복으로(혹은 더 계획적인 다른 이유로) 침공과 학살이 일어났다. 새천년은 살상과 전쟁으로 시작되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단순한 발상으로 이 대본은 쓰였다. 인류의 역사에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폭력을 증오하고 그것을 없애려는 노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선망하고 바라는 힘이 더 굳건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이런 인류니 폭력이니 하는 거대한 발상에 비해 극의 배경과 구조는 단순화되었다. 메타포화시켜 의미 확장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폭력에 대한 인간의 이중성을 반성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어쩌면 우화적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 여러 차례 대본을 수정하면서 여러 부수적인 얘깃거리들이 삽입되었다. 관객과의 만남을 통한 의미 창출을 위해 의미의 영역을 열어놓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제 이 대본을 가지고 연극을 올리려고 한다. 희곡이 이제 제 역할을 마저 하려고 하는 것이다.
소극장의 공연이지만(예전에는 그랬다는 전설이 들리기는 하지만, 요즈음의 소극장은 실험을 하기에 그리 좋은 여건이라 할 수 없다.) 연극적 발상과 표현이 집중력을 지니는, 연극성이 살아있는 연극을 만들고자 한다. 솔직하게 말해, 이 연극을 예술적 자리와 대중적 자리의(이런 표현에 못마땅하실 분들이 계실 지도 모르겠지만) 타협접점에 세워두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는 않겠다. 연극을 하는 사람으로서 연극계의 현실에 대해 무언가 불안감을 느끼면서 이런 강박적 사고를 하게 된 것이 단지 최근의 일은 아니다.그러나 공식적 입장에선 이렇게 이야기해야겠다. 문제작을 던진다고. 그리고 이 말이 허풍이 아니란 걸, 관객과의 만남을 통해 확인하길 내심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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