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내용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풍자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내용이 그리 쉽지 않다. 이 작품은 한국의 뱀 신랑 설화, 즉 '구렁덩덩 신선비'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설화에서처럼 버려진 아내가 지하세계에 가 뱀 신랑을 찾아 행복하게 사는 결말이 아니다. 설화에서 뱀 신랑이 지하세계로 오게 된 것은 굳은 약속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허물을 아내의 언니들이 몰래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지하생활자들'에서 뱀 비늘 남자는 군인에 의해 살해당한다.
고연옥 작가는 뱀 신랑 설화에 강호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인 강호순의 이미지를 입히고 이 시대 우리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가 대사를 통해 묘사하는 것은 강호순이라는 인간을 생겨나게 한 부조리한 사회조직과 인간 군상들이다. 논리 보다는 이미지가 강한 대사들을 통해서다. 전체적으로 기승전결의 스토리도 없을 뿐 아니라 단문단답형의 선문답 같은 알쏭달쏭한 대사들이 자주 나온다. 스토리텔링에 익숙해 이처럼 비논리적이면서 이미지가 강한 대사를 따라잡지 못하는 관객들에게 어려울 수밖에 없다. 또 '지하생활자들'의 내용은 신화적이고 제의적이다. 설화에서 지하세계로 남편을 찾아 떠나는 여인은 신화 속 인물의 이미지다. 그리스 신화에서 독사에게 물려 죽은 에우리디케를 찾아 지하세계로 가는 오르페우스의 모습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또 극중 뱀 비늘 남자는 제물로서 희생되는 사람의 이미지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뱀 비늘 남자는 이렇게 외친다. "인간이란 어디에 있어도 똑같지. 변하질 않아! 너희들은 (지상세계에서 지하세계의) 내 등을 밟고 서있지만, 내 밑으로는 시커먼 수렁만이 놓여 있어. 난 매일 매일 너희들의 끝없는 밑바닥을 채우기 위해 나 자신을 더 깊이 떨어뜨려야 했어." 이 부분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작가의 메시지다. 결국 지하생활자들은 언제나 상승을 추구하는 지상세계의 인간들을 위해 희생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같은 작품의 신화성과 제의성을 감안하면 약간 어정쩡하기는 하지만 길놀이가 있고, 개방되어 있는 무대 공간을 활용해 '열린 연극' 형식을 도입한 것이 전혀 엉뚱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내용과는 걸맞지 않은 것으로 느껴지던 형식은 극이 전개되면서 서서히 묘한 화학적 결합을 하게 된다.
작품 안에는 우리 사회의 최근 역사 속 대형사건이나 인물 또는 사회구성원들의 집단 심리를 드러내는 듯한 간결하면서도 이미지가 강한 대사들이 많다. 그렇게만 볼 수 있다면 '지하생활자들'은 어렵지 않다. 관객의 느낌에 따라 서로 크게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글
막이 이야기의 모티브는 우리나라 전래민담 '뱀 신랑 설화' 이다. 뱀 신랑과 결혼한 여자는 '뱀 비늘 옷(허물)'을 태워버림으로써 신랑에게 버림받고 그를 만나기 위해 지하세계로 간다. 뱀에 관한 신화나 전설이 동서양을 불문하고 뱀을 악마적인 존재로 그리는 반면 이 설화는 뱀 신랑 아내의 시련을 다룬다. 표면적으로는 순애보 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바닥을 기어 다니는 뱀을 쫓아 지하세계로 향하는 이야기 속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중요한 물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인간은 상승을 원하는가? 높은 인격과 고귀한 영혼을 꿈꾸는가? 그 길은 고단하고 외로우며, 갑작스러운 추락만이 예정되어 있을 뿐이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하루아침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불행이 닥친다. 불행이 우릴 비켜가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그 당사자들이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높이 오르고자 애써봤자, 추락하고 나면 모두가 똑같은 밑바닥이다. 그리하여 우린 그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고자 지하세계로 들어가고 스스로 지하생활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삶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밑바닥을 동경하고 그 속에서 살아갈수록 우린 점점 더 깊은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어떤 구원도 기대할 수 없는, 무생물적 삶을 살게 된다. 이미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삶 속에 진입하였다. 어쩌면 인간은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삶을 끌어올려야 하는 운명을 가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시간이며, 구원이란 높은 곳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끌어올리려 애쓰는 이 현재의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 이야기의 또 다론 모티브는 외진 버스정류장 근처에서 여성들을 차에 태웠다가 나중에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한 '강호순 사건'이다. 오직 누군가!" 위해서 고단한 삶을 살았던 한 여인은 죽음 직전에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고 (그가 자신을 죽인 사람인지도 모른 채) 이 세상을 뱀처럼 기어 다녔던 한 남자를 따라 지하세계로 들어간다.
이 극은 여인의 꿈의 여정을 따라 불연속적인 장면 즉, 비논리적인 꿈의 전개 방식으로 진행된다. 높이 올라갈수록 인간의 밑바닥과 가까워지는 인간의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을 드러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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