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에 능한 안평대군은 자신의 궁궐인 수성궁에 여선들을 두어 밤낮으로 문장을 가르치고 혹독한 수련을 시킨다.
수성궁 밖으로의 출입을 금하고 매일 갇힌 새처럼 궁 안에서 시를 짓는 궁녀들.
어느 날, 수성궁을 방문한 소년 유생인 풍류랑(김생)과 운영의 만남!…. 둘은 처음 보자마자 운명적인 인연임을 가슴으로 느끼고, 온 몸으로 서로를 원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에 괴로워한다. 운영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한 방도를 알고자 무녀를 찾아간 풍류랑은 무녀를 통해 운영에게 편지를 전하려 하나 무녀는 첫눈에 풍류랑에게 반해 오히려 사랑을 고백하고 편지를 전하지 않는다. 안평은 운영이 짓는 시들에 다른 사랑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 미칠듯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운영을 강제로 취하고자 한다. 풍류랑과 운영은 함께 도망갈 것을 맹세한다. 풍류랑은 하인인 특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특 또한 심중에 운영을 품고 있었다. 특은 몰래 운영을 데리고 나와서는 운영을 겁탈하고 그녀의 보석들을 챙겨 도망간다. 만신창이가 되어 궐내로 잡혀온 운영은 결국 분노한 안평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 특은 자신의 주인이었던 풍류랑마저 죽인다.
풍류랑이 묻힌 자리 위로 운영의 상여 행렬이 지나가고, 운영과 풍류랑의 넋은 서로를 꿈꾼다. 닿을 수 없는 인연, 그래서 사랑은 고통이다!
상징과 압축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격정적인 운명이 불러온 병적인 사랑!
<상사몽>에서의 사랑은 집착-소유, 사랑-맹목, 질투-욕망, 배신-애증이다. 사랑의 병리적인 감정들로 좌절하는 인물들! 원초적인 감정들이 정신병원을 상징하는 백색 컨셉의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는 비극적 드라마는 과연 이 시대의 사랑이 지닌 진정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제시한다.
작자미상의 한국 고전소설 ‘운영전’이 양정웅을 만나 ‘상사몽’으로 각색되어 관객과 만났다. ‘상사몽’으로 무대에 오른 것은 이번이 네 번째로 2007년 극단 여행자가 이미지 극으로 첫 선을 보인 바 있다. 특히 이번 공연은 대학로 우수작품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로 기획되었으며 기존의 실험적 작가주의와 달리 원작소설의 서사구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원작 운영전은 주제가 권선징악인 여타 고전소설과 달리 조선시대 궁녀 운영과 김 진사 간의 신분을 뛰어넘는 지고지순한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다.
유영이라는 선비가 꿈에서 운영과 김진사에게 직접 들은 사랑의 이야기를 전하는 서사구조여서 운영전은 수성궁몽유록 또는 유영전이라고도 불린다. 유영이라는 선비를 내세워 운영과 김진사의 사랑을 전하는 두 겹 서술 구조의 액자 형 구성이 특이한 우리 고전소설을 양정웅은 극단 여행자와 함께 충실하게 무대에 되살려놓았다.
세종의 셋째 아들로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서·화에 두루 능했던 안평대군은 궁녀 중 나이 어리고 용모가 아름다운 열 사람을 뽑아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불철주야 문장 공부에만 매진하게 한다. 궁 밖으로 나가거나 외부 사람을 만나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안평대군은 궁녀들로 하여금 오직 시만을 위해 정진할 것을 맹세하게 한다. 궁녀들은 과연 안평대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당대 이름 꽤나 알려진 문장가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시의 세계가 고매하고 격조가 높았다. 그러나 열 사람의 넘치는 재주는 안평대군이 세우려는 순수시라는 왕국의 제단에 쓰일 제물일 뿐이었다.
깊디깊은 궁궐 안에 갇힌 푸른 젊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저당 잡힌다. 한편 운영이 수성 궁을 찾아 온 소년 유생 김 진사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우여곡절 끝에 다른 궁녀들의 이해와 절대적인 도움을 받아 김 진사와 목숨을 건 사랑을 나누면서 안평대군의 순수시를 향한 탐미적 열망은 부서져 내린다. ‘시는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서 가리고 숨길 수가 없는 법이다’ 푸른 연기를 주제로 시를 지어보라는 대군의 명에 따라 지은 운영의 시에는 그의 말처럼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나왔고 수성 궁에 와서 지은 김 진사의 시에도 연정이 우러나와 결국 운영과 김 진사의 사랑은 더 이상 비밀이 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대군의 노여움이 극에 달해 운영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순간, 아홉 명의 궁녀들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운영의 목숨을 살려주길 간청한다. 궁녀들의 심미적 현실 인식이 실천적 이성으로 나아가며 빼앗긴 인간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지란은 당당하게 말한다. 하늘을 나는 새도 제 짝이 있는 법인데 우리 궁녀들은 산인도 아니고 중도 아니면서 이 깊은 궁에 갇혀 세상을 멀리하고 지내야 하는 가련한 신세이며 김 진사를 궁 안으로 불러들인 사람은 대군이니 운영에게만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자신의 뜻을 대군에게 밝힌다.
‘시는 자유로운 성정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였는데 운영을 잃고 어찌 우리 궁녀들이 다시 시를 쓸 수 있겠는가? ‘
대관절 시가 성과 속을 가르고 여자와 남자를 가르고 귀천을 따지고 진자리 마른자리를 고르겠으며 사랑에 또한 경계와 조건이 있을 텐가? 운영은 결국 자결을 택하고 얼마 뒤 김 진사도 운영의 뒤를 따른다. 천상의 세계에서 부부의 연을 이룬 두 사람은 폐허가 된 수성 궁에 내려 와 지난날을 돌아보다 유영을 만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후세 사람들에게 잘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뜻을 정중히 받들어 무대 위 모래밭에 유영이 이야기책을 묻으며 양정웅의 네 번째 상사몽의 막이 내린다. 상사몽. 누가 무엇이 있어 꿈에도 서로 그리는가. 설령 그토록 꿈에 그려 얻어진 것이라도 시간을 버텨낼 수 있는 것이 과연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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