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외적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적의 숫자가 아군의 숫자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장군과 신하는 고민에 빠진다. 싸울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 그런데 너무 많은 고민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에 이른다.
“한데 숫자가 적다고 해서 반드시 불리한 것만은 아니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 불리함을 극복하고 싸움에서 이기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그런 때면 좀 더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니까. 그래서 때로는 수적인 불리함이 유리한 경우도 있지. 이 사실에 비춰보면 우리가 결코 불리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아니, 우리가 불리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유리한 것 같은데. 아니, 절대적으로 유리한 건 절대적으로 불리한 우리 쪽 같아….” 이렇게 말을 하면 할수록 헤어 나올 수 없는 함정이 된다. 기발한 ‘말장난’은 연극 ‘당나귀들’ 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대사 중 하나다.
시대와 장소도 알 수 없이 외적이 침입했다는 상황만 설정된 한 나라를 배경으로 삼은 연극은 사건 대신 공허한 대화가 지배한다. 예를 들어 장군을 애타게 찾아 나선 신하가 그를 만나 “저희가 장군님을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장군이 “나를 찾는 것을 못 봤으니 그건 모르겠는 걸”이라고 넘어가는 식. 작가 정영문은 “말은 너무나 무성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의 ‘무력감’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작가가 “사무엘 베케트의 영향을 받아 희곡을 쓰게 됐다”고 말한 것처럼 이 작품은 부조리극을 표방한다. 때문에 극적인 줄거리도 없다.
관객들이 난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이지만 경쾌하고 풍자적이다. 의식적인 ‘대사’가 아닌 단순한 ‘대화’로 희곡이 가진 말의 묘미로 연극은 때로 폭소를, 때로 실소를 자아내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흘러간다.
이 작품의 내용은 뷔리당의 당나귀 우화에서 소재를 따온 것이다. 당나귀 앞에 양과 질이 같은 당근 두 개를 내밀면 당나귀가 어느 것을 먹을지 결정하지 못하다가 고민 끝에 굶어 죽게 된다는 우화다. 적군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왕은 이미 도망갔고 장군은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고 고민만 거듭한다. 신하들 역시 똑같은 생각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장군의 독백은 우습다 못해 처절하다. "이것이 선택의 문제만 아니어도 결정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결정을 요구하는 모든 것이 선택의 문제이고 그래서 결정은 항상 어렵지." 작품 속 인물들은 무언가의 결정을 눈앞에 두고 우왕좌왕하는 당나귀같이 우매한 모습을 드러내며 생각만 하다가 결국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결론만 내리는 미련함을 보인다.
희곡을 쓴 소설가 정영문은 96년 등단 이후 난해하면서도 실험성 강한 작품으로 문학계의 관심을 받아왔다. ‘당나귀들’은 그의 희곡 데뷔작으로 지난해 국립극장 창작 희곡 공모에 당선한 작품이다. 당시 심사위원들에게서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부조리극적인 형식에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대단하다”는 평을 받았다. 정씨는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뒤 소설가로 등단,
「검은 이야기 사슬」로제12회 동서문학상을 타는 등 주목을 받아온 작가다. 김씨 역시 뮤지컬 「태풍」「도솔가」 등으로 활동해온 젊은 국악 작곡가다. 심사위원들은 「당나귀들」에 대해 "연극에 대한 기초가 탄탄하고 언어 구사력이 뛰어나며 지리해지기 쉬운 부조리극적 형식에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대단하다. 무엇보다 현대적인 감각이 응모작 중 발군"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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