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지훈 '길바닥에 나앉다'

clint 2016. 3. 3. 11:57

 

 

 

 

 

 

 

작품은 극명한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한 하나의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시장의 우상’과 ‘국장의 우상’을 통해 인간의 언어, 즉 말이 곧 소통이라는 등식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를 현실사회에 대입해 비판적 시선으로 풀어냈다.

 

 

 

 

 

조명이 켜지며 드러난 무대는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는 고요한 새벽, 도시 외곽 주택가 한적한 길가다. 길 양쪽 끝에 놓인 안전펜스는 인간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영역을 보호하고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려는 그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무대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음침하다. 그러면서도 몽환적이다. 극은 인간 세상에 정착하지 못해 추위에 떨며 힘겨워하는 나목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그 뒤를 이어 인간의 형상을 했지만 인간이 아닌 기린과 뚤레 (멧돼지)가 나타나 도로에 참기름을 바르며 아스팔트를 뜯어내려 힘쓴다. 이를 뒤에서 몰래 훔쳐보며 기회를 노리던 노루도 덩달아 합류한다. 여기서 아스팔트를 뜯어내는 것은 그 곳에 묻혀버린 흙을 끄집어내기 위한 작업, 즉 자연을 덮고 있는 문명을 분리시키기 위함이다. 기린은 극 초반 이 기름을 중국산 혹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참’기름 이라며 강조한다. 이어 자신을 공권력이라 소개하는 경찰과 삭막한 세상 속에서 포창마차를 잃어버리며 절망을 겪는 여인, 반복되는 찌든 삶의 힘겨움을 보여주는 집안의 사내, 남의 물건을 탐내는 삼세기, 인간세상의 어지러움을 표현하는 찐빵사내들이 잇따라 등장해 이들과 대치한다. 특히 검은 봉지 한가득 찐빵을 들고 나타난 찐빵사내들은, 표면은 하얗고 따뜻하지만 속내는 시커먼 인간들의 속성을 상징한 ‘찐빵’을 통해 세상의 모든 호의가 결코 달콤하지만은 않음을 상기시킨다.

극 속에서 ‘묵묵부답 족’ 기린, ‘비분강개 족’ 뚤레 그리고 ‘호시탐탐 족’ 노루라 불리는 이들은 아스팔트 도로 위를 지나가는 인간들을 조롱하고 비판한다. 유난히 사회적 풍자가 가득한 기린의 대사는 극의 매력을 더해준다. “노인정은 많으나 어른이 없는 세상이다. 여전히 위선자들은 겸손을 내세운다. 뭐가 있어야 겸손하지 뭐도 없는데 겸손은 무슨 겸손. 있는 놈들의 미덕이 겸손 아닌가? 겸손한 척 그냥 살고들 있구나.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는 시대는 어디로 갔나. 오늘날 인간은 수돗물 중독자”라는 독백을 통해 기린은 오늘날 권력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는 우리사회의 병폐들을 신랄하게 야유하고 비꼰다. 특히 찐빵사내1은 80원이 부족해 미납된 고지서를 들고 나와 국가 감시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심리를 이야기하며 우리사회의 현안을 되짚어 보게 한다.

 

 

 

 

극은 중간 중간 나목의 “구름이다”라는 대사와 함께 다소 몽환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묵묵부답 족 기린은 마치 하늘을 나는 듯 두 팔을 벌려 상념에 젖은 모습으로 구름을 바라본다. 여기서 구름은 이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이다.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은 아마도 문명과 권력에서 자유로워지는 세상, 그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야쿠르트 아줌마는 야쿠르트가 몸에 좋다며 빨대를 꽂아 하나씩 나누어준다. 여기에서 하나의 반전이 드러난다. 그녀는 자기를 야쿠르트 아줌마로 위장한 폭탄을 연구하는 작가라고 밝히며 난데없이 무대 위로 전단지를 뿌린다. 야쿠르트 아줌마의 갑작스런 신분 고백은 극의 흐름상 조금 뜬금없다. 하지만 그만큼 강렬했다. 마치 작가 특유의 철학적인 마인드가 가미 된 듯하다. 이들은 결국 ‘참’기름으로 아스팔트를 분리해 내는 데 성공한다. 이어 비로소 흙 위에선 나목과 이들의 머리위로 흙과 피와 물방울과 종이전단지들이 뒤엉켜 흩날리며 이유 모를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극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길바닥에 나앉다’는 두둑한 배짱과 슬럼프 모르는 실력으로 ‘괴물작가’라 불리는 김지훈 작가가 안국선 신소설 ‘금수회의록’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작품으로, 인간이 아닌 정령들의 눈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사회를 조롱하고 비판하며 보다 인간다움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사회 부조리극이다. 극은 전체적으로 매끄럽게 기승전결이 연결되기 보다는 시대를 풍자하는 대사와 몸짓으로 코믹적인 요소를 가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다소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또한 눈에 띄어 대체적인 줄거리를 알고 가야 작품의 흐름을 쫓아갈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잠시라도 집중력을 잃어버리면 극의 내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어색했던 극의 흐름으로 자칫 흐릿해질 수 있었던 관객들의 집중력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을 통해 다시 되살아났다. 난해한 만큼 해석하기에 따라 다양한 각도로 비춰지는 매력을 지니고 있는 이 작품은 집중한 만큼 생각하게 하고 고민하게 한다. 권력이라는 이름 앞에 나약해져 일상의 긴장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현대인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뇌어 보게 한다. 이 작품은 바쁘고 각박한 현실 속 인간들에게 던지는 물음표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연옥 '내가 까마귀였을 때'  (1) 2016.03.04
정영문 '당나귀들'  (1) 2016.03.03
박인혜 '청사초롱'  (1) 2016.03.02
장우재 '흰색극'  (1) 2016.03.02
김명학 '남편정벌'  (1) 2016.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