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은 외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다함께 승합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갑작스런 폭설로 정체를 빚는 고속도로의 승합차 안의 상황에서 비롯된다. 임산부 딸은 수시로 진통을 호소하고, 남자들은 답답한 나머지 차 밖에서 시간을 때운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들은 저마다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 상황이 못내 못마땅한 어머니는 남편의 과거 바람행각을 끄집어내고,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사위가 차 트렁크에서 갖고 온 양주는 오히려 이들의 불화에 기름을 붓는다. 한 차례의 갈등이 지나간 후 이들의 대화는 자연스레 몇 년 전 죽은 큰 아들 이야기로 옮겨간다. 네팔의 산 안나푸르나를 동경하던 큰 아들도 이렇게 큰 눈이 내리던 3월에 세상을 떴기 때문. 극의 제목 ‘내 마음의 안나푸르나’도 여기서 따 왔다. 큰 아들을 떠올리며 가족들은 각자 마음속에 담아뒀던 소중한 이야기를 꺼낸다. 특히 사위는 처남(큰 오빠)의 뒤를 이어 안나푸르나에 가기로 결심한 사실을 털어놓으며 다시 극의 긴장감은 고조되어 간다. 임산부 딸의 진통은 심해지는데 차 안에서 출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의사이자 오빠는 피를 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 속에 혼란을 느끼다 결국 가족들의 설득으로 동생의 출산을 직접 진두지휘한다. 가족들의 협력과 격려 속에서 딸은 무사히 아이를 출산하게 되고 때 마침 막혔던 도로도 뚫린다.
큰 아들의 죽음으로 서로간의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버린 가족은 꽉 막힌 고속도로 위에서 딸의 출산이라는 위급한 상황을 다함께 극복하면서 마음을 열고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어찌 보면 다소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인 스토리이기도 하나 어찌 보면 대화가 단절되고 소통이 부족한 우리네 가족문제를 꼬집으면서 일상이 주는 소중한 가치를 일깨운다.
작가의 글
안나푸르나. 내팔 히말라야 중앙부에 있는 연봉. 산타기를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밟아보고 싶은 봉우리. 그러나 밟아보기를 결정하기란 또한 누구에게든 쉽지 않을… 인생에서 넘어야할 산이란 그런 법이다. 빌고자 하는 마음과 돌아서고자 하는 마음의 전투.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 사이에서 벌어지는 난교. 예상치 못한 낭떠러지. 그러나 구원처럼 다시 찾아오는 아침 햇살. 그렇게 일상은 질서정연치 못한 문제와 해법의 소용들이 속에 던져져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와 치유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삶아가고 있다. 갈등과 오해란 이 어지러운 삶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음원임에도 불구하고 오선지 안에 들어갈 수 없는 불청객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이해라는 건 오해라는 커다란 틀 안에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는. 이해와 오해의 변주가 계속 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볼 수 없었던 걸 보게 된다. 그 변주가 결국 살아가는 이야기임을, 단순한 망설임에서부터 목숨 걸어 넘고자 하는 커다란 의지까지 그 모든 순간이 바로 정상에 오른 것이었음을. "몇 년 전쯤인가//. 갑작스러운 폭설로 고속도로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마비되었던 일이 있었어요. 짤막한 기사가 났었는데. 그 마비되었던 시간 동안 사람들은 뭘 했을까? 혹시나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있었다면 그 예상치 못한 오랜 시간 동안 무슨 말들을 했을까. 그 사람들이 가족이라면 또 어땠을까 궁금했어요. 그러다가, 만약에 내가 거기 혼자 운전하다가 갇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으로 번지더니 어렸을 때 봤던 어떤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대학 산악반이 무리하게 인수봉 등반훈련을 하던 중에 눈 때문에 조난당해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버티다가 몇 명이 죽은 일이었어요.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는데, 그 두 사건이 공교롭게 3월이었던 것도 같고, 예상치 못한 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 {분명히 왜곡되었을 거예요). 시속 100킬로의 고속도로, 그리고 서울 지척의 인수봉에서 일어난 일이란 점이 왠지 같은 사건인 듯싶었어요.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벼랑 끝. 뭐 그런 게 구상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무겁게 접근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의도적으로 코믹하게 쓰려고 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웃긴 부분이 생겨나더라고요. 어. 이건 재미있겠는걸. 하면서 쓸 때는 그나마 즐거웠죠. 그렇다고 관객을 꼭 웃겨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재미는 웃음일수도, 울음일수도 있고, 어쩌면 성찰이나 진지함, 심지어 고통이나 공포도 무대에서 재미로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고 우기는 편이에요. 저 스스로는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면서, 쓸 때는 그러려고 해요. 그런데 재미있다고 써놓고 다시 읽으면서, 뭐야 이건? 왜 이따위지. 하는 걸 발견하는 일은 힘든 일이죠. 질문에서 좀 멀어진 대답일 수도 있지만, 무대에 올라갔는데 지루해하는 관객을 보면, 아.. 이를 어쩌지, 싶죠. 제가 아는 어떤 작가는 시계를 연신 확인하는 관객을 보면 고통스러워해요. 심지어, 때리고 싶다고 했던가....
다른 이야기에서도 방법적으로는, 역시 재미를 염두에 둘 것 같습니다. 결국, 사는 이야기를 쓰겠죠. 그런데 저는 모든 생활, 신념, 태도들이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어폐가 있는 말이긴 해도, 비정치적인 것도 정치적인 거죠. 누구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끝내 쓰고 싶은 것은 그런 생각들이, 살아있는 케릭터들의 모습에서 묻어 나오는 희곡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제의식에 사로잡혀 써봤더니 기획자도 연출자도 관심이 없더군요. 아내는 40대나 되어야 좀 쓸 수 있을 거라는 데, 모르죠. 자기가 하는 일이 다 그렇겠지만. 희곡은 쓸수록 어려운 것 같아요. 또한, 희곡은 계속해서 누군가를 의지하고 있잖아요. 연출을 의지하고 배우를 의지하고 있죠. 희곡의 문학성을 중시한다 해도 현실적으로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실제로 제가 아는 많은 극작가들은 다른 직업들이 있어요. 물론, 없는 사람도 있고요. 그 직업들은 약간의 돈을 주는 대신 희곡 쓸 시간이나 힘을 뺏어가죠. 한국에 전업 극작가가 몇 명이나 될까요? 그런대도 왜 쓰는 거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얼마 전에 읽은 이영광 시인의 말을 무단도용
해서 억지로 '시' 를 '희곡' 으로 바꾸어 대답하고 싶어요. "절로 물입이 되는 노가다." 아마 희곡의 매력은 불가능을 주물럭거리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위안이 될 리가 없다'. 저를 위안시키는 말이더군요.
작가 박춘근. 대표작/ <민들레 바람되어>, <아내들의 외출>, <내 마음의 안나 푸르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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