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근대기, 마을은 윤초시을 주축으로 한 윤싸 사람들과
소수의 다른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시골마을이다. 윤초시의 주도아래
자급자족으로 살아가던 마을에 겨울 바람(북풍, 하늬바람)을 타고 어느 날,
준일이 약 20년 만에 마을로 돌아온다. 고향에 공장을 지어 마을을 개발하겠다는
겉으로의 이유였으나 사실 준일은 자신의 부모를 죽인 윤초시에 대한 복수를 위해
돌아온 것이다. 윤초시 이를 알고 준일을 제재하려 하지만 물질과 쾌락을 제공하며
마을 사람들의 환심을 산 준일은 점차 윤초시을 옥죄어올 뿐이다.
이대로 공장이 건립되고 새 지도자 준일에게 마음을 빼앗긴 마을 사람들이 직접
윤초시을 끌어내리는 것으로 끝이 나기면 하면 되려던 찰나 외의의 사건이 발행한다.
바로 마을 뒷산에서 백제시대 고분이 발견 되어 이것이 유적지로서의 가치를 두고
공장건립이 미루어지고 만 것. 평소 유물에 애착을 갖고 있던 윤초시는 교수인 아들을
앞세워 발굴에 앞장서게 되고 준일과 윤초시의 욕망충돌은 극에 달한다.
임준일과 윤초시의 숙명적인 대결은 그 긴장을 더하게 된다.

악(惡)한 어린이, 존경받는 모습 뒤로 자신의 가문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노인 등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 -
지혜로운 노인, 순수한 어린이, 연약한 여성이 형용사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지만 드러내기는 쉽지 않은(특히 작품 속에서 캐릭터가 정해져 있어
정형화 되어 있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욕망이 그의 작품에는 흔하게 드러난다.
그의 작품에서는 평범한 사람들도 특별해진다. 독자는 겉으로는 평범한 인물들이
드러내는 솔직함에 매력을 느끼고 이들이 이끄는 이야기에 점차 빠져든다.

이 작품은 하나의 특이한 가설을 전제하고 있다. 첫째는 "인간의 가슴속에 누구나 감춰진
악마가 있다"는 가설이다. 여러 형태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이 감춰진 악마성이야말로
인간 본질의 하나라는 것이다.
둘째는 대중은 악마성을 가지고 있되, 우매해서 그 악마성을 특별한 어떤 사람에게 항상
조작당하고 이용당할 수 있는 위험에 놓여있다는 가설이다. 이 극의 주인공 임준일은 바로
그 점을 이용,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2가지 가설이긴 하지만 결국 문제는 인간내면에 잠재한 악마성에 귀결된다.
고분발굴지라는 특수한 역사의 상황을 세트로 하는 이 작품은 관객에게 증명이라도
해보이려는 듯 다양한 그림을 비춰주고 있다. 수많은 사람의 현장도, 상황도, 조직사회의
비리도, 그리고 역사도, 바로 이 마성이 연출해내는 다양한 조건반사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늬바람은 서쪽에서부터 부는 차가운 바람인데 여기에서는 인간 내면에 감춰진 그 원초
적인 마성으로 상징되고 있다. 마성은 언제든지 밖으로 휘몰아치길 열망하고 있지만
평소엔 억제당하여 숨어 있다는 논리다. 우리 시대의 어둠이 어디에서부터 연유하는지를
밝히는 새로운 방법론이 되는 것이다. 임준일이 벌리는 한마당 허망한 굿거리에서 관객은
악마성의 가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작가의 글 - 박범신
희곡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고 처음에 나는 주저하였다. 내가 기왕에 써온 소설과는 장르가 달라 자신도 없었거니와, 특히 원작소설을 기법이 판이한 희곡으로 각색할 경우, 결국은 내가 쓴 원작을 내 스스로 파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예감은 철저하게 들어맞았다. 나는 소설을 쓸 때의 의도와 무대공연이라는 양자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한동안 전전긍긍하였다. 연극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나와는 개인적인 교분도 있는 연출가 방태수 선생이 아니었으면 아마 포기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방 선생이 희곡에 입문을 시켜준 셈이다. 나는 가급적 이 작업에서 하나의 명제, 인간 본질의 악마성이라는 점을 조명하려고 애썼다. 성선설(性善說)에 나는 굴복할 수 없다. 나는 오히려 눈에 뵈지 않으나 때로 포악스럽게 우리를 지배하는 마성(魔性)이라고 밖에 달리 부를 수 없는 미친 바람 같은 그 무엇인가가 인간 내면에 본질적으로 잠재해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 바로 그 악마의 정체를 추적하면 우리 시대의 어둠이 어디에서부터 연유하든지 그 핵심에 근접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원작에서는 이 문제 이외에도 몇 개의 부주제(副主題)가 있었다. 희곡에서 그린 것을 일일이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자연히 원작의 본래 의도는 물론이고 사건도 대부분 파손되었다. 나로선 스스로 내 손가락을 잘라내는 나를 경험하게 되었다. 봄이라고 한다. 하지만 벌써부터 나는 겨울이 그립다. 어서 겨울이 다시 오고 칼날같은 미친 바람이 불어왔음 좋겠다. 내 고향의 암회색 강변으로 달려가 쓰러진 갈대, 무분별한 바람, 폐기된 등대 안의 그 찰복한 어둠을 맨가슴으로 껴안을 수 있게 진실로 나는 악마가 되고 싶다. 극단 에저또에 내 미진한 희곡이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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