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장두이 '물고기가 날으는 째즈카페'

clint 2026. 5. 26. 05:04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하는 '지나'가 서울근교 원당에 있는 교수님댁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들르게 된 한 카페에서 '제민'을 만나게 된다. 째즈 음악만을 틀어주는 
이 카페에서 제민은 지나에게 흥미를 느낀다.
얼마 후 그날도 비가 내리는 카페에 들른 지나에게 제민은 친근한 친구의 감정과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외교관 아버지를 두었던 지나 역시 
제민에게 자신을 기댈 수 있는 포근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지나는 아버지를 따라 떠돌며 
경험했던 이국에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고독을 토로하며 제민과 탱고를 춘다.
제민의 생일날. 제민은 지나에게 전화한다. 그날도 비가 오고 있었고 또 수요일이기에 
지나를 기다린다고 한다. 지나는 제민의 전화에 당혹했으나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카페를 다시 찾는다. 드디어 광란의 생일파티는 벌어진다. 제민은 청소년 시절의 얘기와 
이슬람교를 통해 얻어진 자신과 부모의 삶에 대한 진지함과 이슬람교 수도승들의 
제의적 춤을 출 것을 권한다. 밤이 깊도록 두 사람의 이야기와 체험의 나눔은 더욱 
그들을 가깝게 다가서게 한다. 우연찮게도 두 사람은 자신들이 찾고자 하는 이상이 
같음을 인지하게 된다. 드디어 그들은 천국으로의 여행을 꿈꾸게 된다. 
사랑의 노래를 부르 고 춤을 추고......
마침내 지나의 졸업전시회가 끝나는 날 두 사람은 애써 찾았던 성장의 모습을 갈구하며 
"굶주림도 싸움도 살인도 질투도 거짓도 악의도 없는"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 
그것은 자유와 해방이며 더나은 삶을 향한 소중한 행진인 것이다. 
결국 천국은 현실이요, 그들 마음속에 깃든 사랑이었던 것이다. 
진실된 사랑속에서 모든 것은 해탈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은 이 작품속에 나오는 '가수'의 노래와 같은 것이다. 고통과 번민을 헤쳐 
얻고자 하는 자유와 신의 경건한 품속에서 듣는 자장가 말이다.

 


탐욕, 질시, 거짓이 가득한 '카페'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물질적인 대가를 바라는 
타산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순수한 사랑과 구원을 찾아가는 젊은이들의 방황을 
시각적이고 환상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장두이가 작· 연출을 했다.
극단 성좌 공연(1997. 6월) - 브로드웨이에서 활약하는 재즈뮤지션 윌리엄 루커스가 
참여해 막간에 본토의 정통재즈를 선보이는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그는‘자유(Freedom)’,
'제리코(Jericho)’ 등 10여 곡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있는 음악' 재즈를 연주한다.
음악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한 미국의 배우이자 재즈 뮤지션 윌리엄 루카스가 가수로 
등장하는 이 공연은 작품을 쓰고 연출한 장두이의 문화 다원주의적 발상과 주장을 
젊은이들의 삶과 의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차라리 천국이고 싶어라- 장두이 작·연출
이천년대의 주역이 될 현 이십대 젊은이들 의 의식구조는 과연 무엇일까?
이들의 생활 논리와 국가관과 미래에 대한 준비는?
'물고기가 날으는 째즈카페' 는 카페를 찾은 두 남·녀(제민과 지나)의 일종의 고백록이다. 이미 어려서부터 째즈처럼 서구 문화에 다소간 영향을 받은 이들의 삶의 흔적은 곧 우리 이천년대를 향한 증후군이다. 어느 세대이건 흐름과 방향과 패션이 있다. 그런가 하면 추구하는 행복의 파라다이스가 있다. 그것은 꿈이다. 대사에 나오는 것처럼 "굶주림도 싸움도 살인도 질투도 거짓도 악의도 없는 곳"을 이들은 찾고 있다. 그야말로 유토피아에의 갈망인 것이다.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해 미국행을 꿈꾸는 제민과 외교관을 아버지로 둔 도예과를 다니는 지나의 삶의 척도는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입시지옥 속에서 감수성을 외면당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듭 태어남일 것이다. 모순되어 보이는 기성세대의 삶에 대해 그들은 다른 인생여정을 갖고 싶은 것이다. 비록 부모들의 염원에 의해 이제껏 타협속에 살아왔지만 비로소 더 나은, 더 확대된 삶의 지평을 찾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 작품 전체에 등장하는 '가수'역이 또 한 작품 형상화에 큰 실마리가 된다. 가수가 장면과 장면 사이를 이어주는 단순한 다리 역할뿐 아니라 크게는 무대감독이면서 상징적 의미로서 젊은이들이 가고자하는 파라다이스로의 안내자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의 행동반경은 작품의 리듬과 템포를 조절하고 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분명 메시지가 확실하다. 보다 영혼적이며 종교적이라 할 수 있다. 가수가 이처럼 폭넓은 역할을 하듯이 이 작품은 단순한 째즈카페 안에서만 일어나는 얘기는 아니다. 때로는 깊은 바다속, 천국, 아르헨티나의 한 작은 마을 둥...... 카페안이지만 다양한 연극적 장소로 쓰이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복합 문화권의 시대이다. 단순한 문화적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급변하는 세계속에 나름대로의 삶의 질과 존재이 유를 우리는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표현은 매우 복합적이다. 마치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깊은 내면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세계를 독자적으로 표출해 내듯이 우리는 인간교류의 위험한 시대에 도달했다. 
두 주인공이 긴 터널속에서 찾는 구원의 빛처럼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그 꿈을 모색하고 싶었다. 그것은 장차 우리가 일구어야 할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