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대극장, 오선생이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을 연기하고 있다.
재판장면이다. 샤일록이 빚 대신 심장부근의 한 파운드의 살을 베어내는 장면이다.
포샤가 새로 도착한 법관으로 등장을 하고 원작의 내용대로 극이 전개된다.
오선생의 샤일록이 계약대로 한 파운드의 살을 베어내야겠다는 명장면을 연기한다.
선생은 60년을 무대에서 보낸 노배우다. 분장실에서는 선생의 언더스터디인
정환이 모니터를 보며 선생의 대사와 연기를 지켜 보고 있다.
정환은 20년차 연극배우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선생의 언더스터디다.
그러던 오늘, 공연이 끝난 후 선생의 모습이 평소와 다르다.
중간에 대사도 부분적으로 까먹고 임시변통으로 때웠다.
1년전 의사가 경고 했던 알츠하이머의 증상이 서서히 기억을 지우는 것 같다.
밖으로 내색을 안 하지만 선생은 자신의 배역을 정환하게 물려줄 결심으로
의상의 품이 끼어 불편하다는 둥, 분장사를 부르라는 둥 이상한 주문을 해서
수행 비서 같은 정환을 놀라게 한다. 그리고...
그건 오선생이 작전이었음이 밝혀진다.....

언더스터디(understudy)는 원연기자가 부재 시 대체할 수 있도록 역할을 준비한
배우(대역배우)이다. 전형재 작 송미숙 연출의 <언더스터디>는 2016년 11월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극중 샤일록 역을 맡은 선생에 실제 연기 60년
경력의 오현경 배우가 맡았고 그의 언더스터디 역에 류태호가 맡았다.

이 <언더스터디>는 주어진 현실에 패배하지 않고 평생을 무대에서 보낸 노배우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린다. 이 작품은 "배우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에 대한 깊이 있는
공감을 바탕으로 연극의 본질과 그와 닮아있는 우리의 삶을 비추어 그려낸 작품이다.
연극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창조되는 새로운 삶이다. 배우는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현실적인 인간이면서 동시에 무대라는 환영 속에 존재하며 또다른 삶을 살아간다.
따라서 배우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서있는 자들로 언제나 불안하고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언더스터디>는 늘 이러한 경계에 있는 배우로서의 삶을 진솔한
무대로 풀어내고 따뜻하게 위로한다. 뿐만 아니라 배우로서가 아닌 자신의 삶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진솔한 모습을 조명하며 인생이란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작가의 글 - 전형재
이 희곡은 작년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 우리 곁을 떠난 고(故) 김윤하 배우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저는 고(故) 김윤하 배우와는 일면식도 없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의 공연 또한 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그의 죽음을 전파를 타고 들어오는 TV뉴스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그 이후 뉴스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한 3일 동안을 멍하니 있었던 것 같고, 일주일 정도 밤잠을 설치고, 이후로도 몇 달 동안은 까닭 모를 적개심과 연민이 교차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나에 대한 적개심과 그에 대한 연민이었겠죠. 그래서 무엇이든 해야 했습니다. 연극배우 -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혹은 무거움? 고 김운하, 언론은 그의 이름 앞에 '무명'의 연극배우라고 칭했다. 나는 생각했다. 연극배우 중에 '무명' 아닌 사람이 있었던가. 그들은 유명해지자고 연극을 했던가. 연극배우라는 이름앞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가난'과 '무명'이라는 수식어는 언제쯤 우리에게 자유로울 것인가. 세상은 말한다. 네가 좋아 하는 일인데 배 고파도 어쩔수 없지 않냐?" 라고 좋아하는 것으로 배고픔이 상쇄될수있을까 - 배우라는 존재의 가벼움 내 가슴속에 말못할 눈물이 강물처럼 흐른다.
***
이 연극의 연극배우들은 무대와 현실의 경계인 분장실 안에서 그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경계의 불안함을 버티고 사랑한 그래서 주어진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평생을 무대에서 보낸 노배우를 통해 연극배우의 아름다운 퇴장을 말하고 싶다. 나는 언제 먹통이 될지 모를 낡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아름다운 연극배우 이야기를 상상한다. 그런 어느 날 한 연출가 선생님 왈, "세상에 이렇게 훌륭하고 고상한 비현실적인 배우가 어디 있냐."고 나의 글을 나무라신다. 그 선생님의 면전에서 나의 말풍선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연극배우 좀 있으면 안됩니까, 이런 배우를 꿈 꾸면 안 되나요? 너의 연극 속에 나오는 배우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고 타박만 하지 마시고, 너와내가 이런 배우가 나올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격려해주 실수는 없는지요. 그래야 누군가가 또 연극배우를 꿈꾸지 않겠습니까." - 2016년 <언더스터디> 프로그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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