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체호프 '큰 길가에서'

clint 2026. 5. 7. 06:39

 

 

러시아 어느 큰길가 선술집. 
술집 주인이 찌혼과 순례자, 노동자이거나 농민이였던 여행객들이 모여있다. 
그중에는 알콜 중독 취급을 받는 몰락한 지주 보르쪼프도 있다. 
그는 주인에게 술 달라 애원하고 순례자들과 여행자 사이에 계급적 긴장감이 감돈다. 
그러던 사이 도끼를 들고 나타난 농민 출신이였던 메리끄의 등장으로 
술집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보르쪼프의 옛 여인인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지나가던 여행객 꾸지마에게 듣고서 메리끄의 도끼날은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이 작품 "큰길가에서"는 1885년 씌어진 작품으로 당시 검열제지로 출판 무산되고

빛을 보지 못하다가 체홉 사후 10년째 되던 1914년 여동생 마리아가 그를 추모하며

<말>이라는 잡지에 실어,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이 작품 제목 옆에는 1884~1885 라는 부제 같은 형식의 숫자가 붙어있는데, 1884년

우리나라에서는 갑신정변으로 개혁과 봉건주의 사이에 환란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역시 동시대적 역사 유사성을 못 벗어나는 듯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직전이 배경으로 제정 러시아 전제주의 강화와 자유주의를 옹호하던 국민들의 갈등이

극에 달하던 상황으로 무기력과 폭풍 전야의 불온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1884-1885 우연의 일치일까? 이 시기, 사상가 니체의 글들은 정오 사상과 영혼 회귀의

문제로 많은 유고를 남겼는데 특히 그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이를

문학적인 형식으로 표현했는데, 정오의 사상은 니체가 각별히 신경 쓰며 하나의 작품으로

서술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림자가 자기와 통합되는 깨달음의 순간, 독수리가 뱀과 친구처럼

하나 되어 비상하는 시간, 순간과 영원이 통합되는 역리적 지점, 벼락이 떨어져 진리 전체를

보며 새로운 인간(어린아이)으로 태어나는 탄생의 비밀을 말하는 정오의 사상은 인간의

자기 파괴(죽음)와 재탄생(생명)이란 생성의 비밀을 가르친다. 이 현대사상의 거대 담론이

체홉의 진정한 처녀작이라 할 수 있는 <큰길가에서>를 통해 연극적 표현된 것이다.

 

 

 

체호프의 처녀작 <큰 길가에서(1884-1885)>는, 세익스피어 괴테 실러 등의 고전극이

지니는 시적상징언어와 고리키 고골리 등이 보여준 러시아의 거친 역사 현실이

이 작품에서 충돌하는 잡종 교배의 연극 미학을 드러낸다.
신과 인간, 자연과 문명, 이성과 본능, 구 제도와 새로운 변화의 기운이 교차하는 이 작품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말과 몸이 결합되어 연극의 리듬과 공간을 형성하고, 

인간의 내면 심리가 역동적인 언어와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시적 리얼리즘 연극의 본래

모습을 기대해볼 수 있다.  이는 스타니슬랍스키 연극미학이 체호프의 희곡을 제한하고

덮씌우기 이전, 체호프의 원형질적 극문학이 얼마만큼 풍부한 시적 상징과 거친 민중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연희단거리패의 <큰길가에서>(연출 양승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에 대한 회의와 불신에 빠진 인간군상이다. 술주정뱅이를 타박하고 학대하던 사람들은 그가 처한 비극의 전모를 알게 되자 순식간에 동정적으로 바뀌어서는 그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지 못해 안달이다. 지독한 장사꾼인 술집 주인 찌혼조차 그에게 공짜 술을 건넬 정도로 삭막하고 황량했던 술집에는 일순간 훈훈한 인류애가 넘쳐 흐르는 장면이 어찌나 우습던지 그 모순 앞에서 조소를 머금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술주정뱅이 부르조프를 흠씬 두들겨팼던 마을의 악당 메리끄조차 사랑했던 여자에게 배신 당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모든 걸 다 뺏기고 길거리에 버려진 그의 처지를 동정하며 불쌍히 여길 뿐만 아니라 그를 배신한 부인이 술집에 나타나자 그녀에게 매달려 제발 부르조프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 건네달라고 간청한다. 그녀가 거부하자 도끼를 휘두르며 그녀를 죽일 듯이 달려드는 그의 모습 속에서 앞서 보았던 가혹하고 잔인한 악당 메리끄의 잔상을 찾아내는 건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건 잘 모르겠다. 안톤 체홉이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 확신하거나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게 그 텍스트 안에서 본 건 인간이란 존재가 세상과 타인에게 드리우는 모순이다. 완벽한 선도 절대적 악도 없는 세상 속에서 인간은 TPO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모순적인 존재에 불과함을 작가는 꽤 신랄하고 혹독한 어조로 냉소를 머금으며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메리끄가 내리 찍었던 심판과 단죄의 도끼가 그가 벌하려 했던 부인 마리야가 아닌 그가 동정했던 부르조프라는 결말은 모순의 극치이면서 동시에 그가 지향했던 결론에 가장 합당하는 마무리이기도 하다. 작품 속 캐릭터 입장에선 뭐라 할 수도 없는 파국적 반전이고 비극일 테지만 지켜보는 관객들에겐 허탈과 만족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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