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영난에 시달리는 도서출판 '말미잘'에 해삼그룹으로부터
장해삼 회장의 위인전 제작 의뢰가 들어온다.
말미잘 사원들은 기대에 부풀었으나,
금수저를 물고 나온 장회장은 선대로 부터 물려받은 선단과 부동산 등으로
어렵지 않게 대재벌을 이루었고 회장이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장 회장은 특별한 업적도, 본받을 점도 없는 인물.
도전정신을 부각시키려 정회장과 히말라야 원정 등산도 다녀온다.
그런데 급기야 SNS에 정회장 성범죄 혐의가 폭로된다.
이미 선금을 받은 말미잘의 상황에서 위약금을 막기 위해
서둘러 위인전을 쓰기로 한다.
그렇게 그 인물은 '위인'이 된다.
이 '말미잘' 출판사 앞에서는 시위대의 농성이 빗발친다.
이런 상황을 예측한 정회장측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회사의 생존을 위해 악인의 위인전을 출판하려는 출판사 직원들의 이야기를
블랙 코미디의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말맛이 살아있으며 대사에 큰 낭비가
없이 대화를 잘 운용한다는 점, 연극성에 대한 이해로 코미디의 문법을 잘 수행해
낸 작품이다. 하지만 직원들 각자의 입장의 차이가 충분하게 그려지지 못한 점,
성폭력 가해자를 다루는 시선이 정교하지 못하고 뭉뚱그려져 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또 작가가 세태를 비판하는 데 있어 자신과 관객에게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작자가 무대 안쪽으로
들어가 스스로 비난하는 대상이 되어야 블랙코미디의 진정성이 살아나지 않을까?

작가의 말 - 신호권
새벽 3시에 알람이 울립니다. 이 시간에 눈을 뜨는 게 어색하지만,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하루 종일 글을 쓸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물을 한잔 마시고, 아내가 깨지 않게 살금살금 제 방으로 가 노트북을 켭니다.
말미잘의 사장과 사원들은 출판사라기엔 너무 속물적입니다. 조금은 어떤 이상이 남아 있는 인물들로 그려볼까, 아니면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인물로 고쳐볼까, 고민하다가 마음을 접습니다. 회사는 공동의 목표만을 요구하고, 그 목표 앞에서 개인의 이상이나 개성은 손쉽게 묻히는 곳이라는 것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다섯이나 되는 인물들이 똑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지만, 그것도 우리 일상의 부조리의 하나라고 생각해봅니다. 사훈은 그때그때 상황 따라 바뀝니다.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바람 따라 휘날리는 공허한 슬로건의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깃발처럼 펄럭이는 느낌을 생각했다가, 현수막으로 바뀌었다가, 누덕누덕 종이가 덧붙은 액자로 바뀌어 갑니다. 매일 새벽마다 생각은 바뀌고, 어제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장면이 오늘은 밋밋합니다. 어느 게 맞는 건지 장담할 순 없지만, 출근 전 하루 3시간의 짧은 집필시간은 저에게 선택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장 회장은 실제 현실적인 기업 회장을 특정하기보다는 일부러 매체에나 나올 법한 스테레오타입의 기업인으로 그렸습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나쁜 놈보다는 철학이 매몰된 인간을 그리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압도적 악인의 위인전보다는 오히려 '영양가 없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위인전'을 펴내야 하는 느낌이 들게 하고 싶었습니다. 작중에 언급되는 중대한 범죄들이 별 무게를 갖지 못하고 잡범 취급이 되는 것은, 말미잘 사원들의 도덕적 해이이기도 하지만 장회장이 최종 보스보다는 흔해 빠진 악인 정도의 인물이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묘사에 불편함을 느끼신 해당 범죄의 피해자분들께는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히말라야 등산 장면은 원래 없었습니다. 드라마투르그를 맡아 주신 남지수님과 낭독극 연출을 맡아주신 김미란 님께서 지방이 있는 저를 위해 황금 같은 주말 저녁마다 화상회의를 열어 발전적 방향을 보여주셨고, 더 재미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출판사 근무경험을 탈탈 털어 이야기의 뼈대를 세워준 아내와 항상 응원해 주고 힘을 보태주는 가족들, 동료 선생님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사랑과 감사를 보냅니다. 감사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감사합니다.
아, 오전 6시 알람이 울립니다. 벌써 노트북을 덮을 시간입니다. 더 쓰고 싶지만 여기서 더 쓰겠다고 매달렸다간 일본 애니메이션의 클리셰처럼 샌드위치를 물고 출근하게 됩니다. 제 이야기를 읽는 시간이 즐거운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대에서 다시 뵙겠다는 어려운 약속을 적어 봅니다.

부산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부산 세정고등학교 교사.
2025년 <불연성 쓰레기장>으로 <경상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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