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구두리 '금성여인숙'

clint 2026. 3. 20. 17:56

 

 

강부민은 인제에서 50년째 금성여인숙을 운영 중이다. 
여인숙에 장기숙박객 박두홍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유순희가 들어온다. 
집을 나와 무작정 버스를 탔던 유순희는 버스기사에게 추천받아 이 여인숙에 왔다. 
아들과 며느리가 해외로 가면서 자신의 집을 팔고 같이 가자는 것이 꼴 사납다.
여인숙에는 송이를 캐는 심마니 수현과 인제로 공연을 오게 된 드랙퀸 진수도
머물고 있다. 일용직 노동자 두홍도 있고 그와 동창인 용남도 수시로 들른다.
까칠한 유순희는 낡은 여인숙 뿐 아니라 두홍도 수현도 진수도 맘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이 금성여인숙도 도시개발 계획에 의거 머잖아 철거된단다.
금성여인숙은 그래도 80대의 할머니인 강부민이 오래 이어오며 싸고 장기투숙
할인으로 가족같은 서민 투숙객이 모여 식사도 같이하는 그런 곳이다. 
그러던 중 두홍에게 코로나 밀접접촉자라는 문자가 날아든다. 
여인숙의 숙박객들은 주말을 지나 보건소가 열 대까지 강제로 함께 머물 수 밖에 
없게 되었고, 두홍과 원수같은 동창인 용남과 강부민의 양딸 지숙까직 같이 
이곳에 격리된다.  

 

 

 

연극 <금성여인숙>은 직업도 성별도 나이대도 성격도 다양한 사람들이 머무는 
아주 오래된 강원도 인제의 여인숙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며칠간의 이야기이다. 
서로를 이해할 수도 없고, 또 서로가 모를 각자의 사연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한 곳에서 마주치고 부딪히면서 서로 쉽게 비난하고 혐오하다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격리로 함께 생활해야하는 공동체가 되면서 갈등이 커져간다. 
<금성여인숙>은 여인숙이 하나의 작은 격리된 사회가 되고 함께 생활하면서 
어떻게 그 마음의 거리를 좁혀나가는지를 보여준다. 서로의 오해와 불편, 혐오를 
넘어 다양성을 이해하고 함께 공존하는 사회를 <금성여인숙>을 통해 그려낸다. 

 


<금성여인숙>은 강원도 인제에 실제 있는 '금성여인숙'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실제 마당 한가운데 우물을 중심으로 ‘ㅁ’자로 가정집을 개조했던 인제 금성여인숙 
설정을 그대로 무대 위로 가져와 실제 여인숙의 공간을 가운데로 두고 4면을 
객석으로 활용하여 공연된다.
극단 미인에서 공연된 작품으로, 지문을 읽어주는 배우 3명이 있다. "지문” 역할을 
맡은 세 명의 배우(조왕신, 터주신, 성주신)가 먼저 인사와 함께 등장한 후, 나머지 
배우들 역시 각자 맡은 역할을 소개하며 등, 이는 자연스레 음성해설 버전의 역할을 
겸한다- 여기에 자막 역시 제공된다. 실제 있는 공간의 전사(前史)와 인물이 등장하는 

만큼 이러한 역할극을 명시하는 시작은 실제의 서사와 드라마의 서사가 분리되면서도 

연관됨을 의식한 부분으로 보인다. 이러한 명시는 실제의 인물을 연극이 대체할 수도 

없음을 보여주면서, 거꾸로 연극의 자율성이 실제를 온전히 재현하는 문제에서 갖는 

딜레마 역시 해소할 수 있다.

 


<금성여인숙>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상은 '금성여인숙'이 온갖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공간이라는 특성을 자연스레 전제하지만, 더 정확히 이 연극이 갖는 다양성이라는

이념으로부터 선택된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존재가 구성하는 공동체가 갈등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를 금성여인숙이라는 공간을 통해 그려간다. 갈등의 축은

크게 4가지의 범주 아래 있다. 성소수자, 굴절 되고 교착된 근현대사, 오랜 공간의 존립

문제, 고부갈등의 가족사가 그것이다. 앞의 두 개념이 여인숙 내부에서 벌어지는

개인 간의 갈등으로 수렴한다면, 뒤의 두 개념은 여인숙 바깥으로부터 각각 사회적 현실이

개입하거나 개인사가 특정하게 연동된다는 차이가 있다. 

 



강부민과 박두홍, 유순희, 수현과 진수, 용남과 지숙처럼 주요 인물 외에도 
유순희의 가족이나 진수의 지인인 시인 최명제같은 인물도 잠깐 나온다. 이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은 저마다 알 수 없는 각자의 깊은 사연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위의 갈등의 문제를 제시하고 고민하는 것이다. 
그 갈등을 깨고 넘어서는 과정을 대립과 싸움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다양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끌어 가며 ‘그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한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상황으로 여인숙이 하나의 작은 격리된 사회가 되었을 때 함께 
생활하면서 그 마음의 거리를 어떻게 좁혀나가는지 보여준다. 서로의 오해와 불편, 
혐오를 넘어 다양성을 이해하고 함께 공존하는 사회를 그려낸 것이다.

 

 

 

<금성여인숙>은 팬데믹을 통과하고 있는 강원도 인제 산골의 오래된 여인숙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은 그 자체로 시간이 층층이 쌓인 구조물이다. 수십 년간 덧댄 벽, 손으로 직접 다시 올린 마루, 한겨울을 버티기 위해 기워낸 이불까지. 이 공간은 강부민이라는 여성의 노동과 사소한 일상의 흔적들로 유지되며, 이곳에는 다양한 삶의 결, 노동자성과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든다. 사람 좋고 따뜻하던 공간 '금성여인숙'은 코로나 의심자가 나오면서 순식간에 의심하고 분열하는 모습을 보였다가 다시 봉합된다.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던 최초 밀접 접촉자 박두홍에게 '번듯한 일을 했으면 왜 이런 일이 생기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시작으로, 누군가 톱질해 잘라놓은 난간 때문에 다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여인숙에 머무는 사람들은 저마다 숨겨왔던 의심과 혐오를 발산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코로나 때문이었을까? 드래그퀸 황진수에게 '요새 뜨는 애들 많다. 정신 차리고 분발해라'라는 말을 하는 것이 "이놈의 노력은 언제까지 해야하나 싶"은 괴로움이, "여자가 할 직업은 아니지"라고 쏘아붙이는 고지식함이, 정말 코로나 때문에 없다가 갑자기 생겨난 것일까? 물론 아니다. 각각의 인물들이 가진 해묵은 개인의 갈등은 결국 우리나라가 지나온 역사와 개발지상주의 바탕의 자본주의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핍진한 개인의 삶을 묘사하고 겹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거대한 모자이크 판화처럼 대한민국이 겪어온 역사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은 신적 존재들을 끌어들이며 여인숙의 시간성을 확장 한다. 조왕신과 성주신의 대사들은 공간이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그곳을 살아낸 사람들의 감정과 기억을 흡수해 살아있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 자체로 지문을 묘사하기에 '배리어 프리'적인 것은 물론이다. 신의 시선은 공간을 '지켜보는 자'로 설정하며, 사라져가는 여인숙에 대한 일종의 장례의식을 준비하는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만큼 공간의 죽음은 개인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