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의 암살을 밀폐하고 육군장관, 총리. 주치의 및 교수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대통령의 아들과 부인을 중인으로 내세우며 자신들의 허수아비 노릇을 거절하는
사이비 대통령을 계속 갈아댄다. 이들의 양성소인 독재자 핵교에서 예비 사이비
대통령 수련을 하며, 수련자들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준비된 국가 사창굴에서
몸을 풀며 인간이기를 포기한 생활을 계속한다. 여기에 끌려온 한 국회의원 딸인
창녀의 자살기도는 하나의 반란으로 그려진다. 여기에 자유와 정의를 실현하려는
한 호민관이 소령과 대장과 함께 쿠테타에 성공한다. 그러나 권력은 다른 권력으로
대체되었을 뿐 자유와 정의를 운운하는 호민관은 살해되고 그의 죽음은 거짓을
이용하는 권력에 의해 거짓 애도된다. 전 정권의 경호실장은 권력에의 충성을
다짐하며 새로운 권력의 충견이 된다.

<독재자 핵교>는 쿠테타의 좌절을 통해서 혁명과 권력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다.
작가 에리히 캐스트너(Erich Kastner)는 20년대 초기까지 독일 문단을 휩쓸었던
표현주의에 대항한 신즉물주의의 한 사람으로, 신즉물주의자들은 개인적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현실을 담담하게 보며 그것을 알리는 일에 주력했으므로
자연히 기록문학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 작가도 예외는 아니어서 1933년 히틀러
나치의 집권과 함께 강행되었던 소위 금서소각을 지켜보며 아픔을 인내했던
작가이기도 하다. 이런 나치정권의 경험 아래, 구상에서 완성까지 20년이 걸렸다는
<독재자 핵교>는 그 서문에서 "세월이 흘러도 작품의 테마로서의 쿠테타의 고전적
규범인 피와 살상의 순환은 언제나 새롭고 개연성 있는 것이라고 절망하고 있다.
<독재자 핵교>에서 보여주는 혁명(쿠테타)은 혁명보다 한 단계 더 절망적이다.
혁명의 성취는 혁명 전과 똑같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트로이의 말(馬)을
비유하면서 "대체로 피비린내를 풍기면서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독재란, 훨씬
덕망있다고 하는 폭동에 의해 제거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해서 실권을 잡은
반도(叛徒)들은 또 살해당하게 되는 것이고 다음 독재자가 들어앉는 것이 순서"라고
절망한다. 이러한 작가의 확고한 시각으로 말미암아 이 작품는 풍자요 우화적인
의미를 띄게 된다. 번역이 '학교'라는 표준어를 두고 '핵교'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번역의 글 - 김학천
<독재자 핵교>는 작가가 밝혔듯이 구상에서부터 완성되어 출간되기까지 20년이 걸린 것이다. 즉 이 희곡은 나치가 집권하면서 끔찍한 정치기술을 발휘하기 시작한 직후부터 작품이 구상된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 대하고 번역보다는 무대에 올려봤으면 하고 생각한 것은 60년대 초였다. 그러고 보면 번역본이 나오는 데도 20년의 세월이 소요된 셈이다.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쇄하고 공개해 본 일이 없어서 뭣이라고 단언하긴 어렵지만 우리의 정치적 상황이 폭압적이었다는 것은 거꾸로 증명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40년이란 연륜이 이 작품과 우리 독자들과의 사이에 가로놓여져 있다는 점은 우리를 커다란 감회에 젖게 한다. 작가가 서문에서 큰소리로 밝힌 테마의 개연성과 시간이 홀러도 역시 새로울 것이라는 장담은 생각할수록 마음에 남는다. 방황하는 사람들, 끝없이 욕심에 부대끼는 사람들의 형편을 너무 자신있게 꿰뚫었기 때문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쓰여진 유럽의 희곡들은 거의 모두 우충충했지만 그 이후 어느 곳에서도 <독재자 핵교>만큼 절박하고 깊이를 느끼게 하는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상징으로 미적(美的) 재구성을 하는 작품형성 과정에서 직설로 느껴지는 메시지는 오히려 부담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유럽적 사고방식속에서 희곡은 '놀이'이기보다는 내면과 사회에 대한 진단이며 문제의 제기쪽으로 기울어져 왔다. 즉 감상의 수단이기보다는 공시의 수단인 쪽을 택했던 것이다. <독재자 핵교>도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이미 붓을 꺾고 침묵했던 30년대의 연장처럼, 그리고 공연예술의 짜임새를 먼저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가 쓰다만 정치기사의 연장처럼 여겼으리라 생각된다. 작품에 불여 놓은 '코메디'라는 분류는 그것이 있올 법하지 않은 이색적인 '우화'이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였는지 모르겠다. 연극이란 실상 역사 속에서는 아무리 강렬한 메시지라 할 지라도 때로 그것이 '오늘' 속에서 강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독재자 학교>(1956)는 히틀러 시대에 구상된 것이다.
그 제목은 ‘독재자와 같은 교사들이 있는 학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독재자를 양성하는 학교’를 의미한다.
그러나 더욱 정확하게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훈련장, 조련장으로서의
학교라는 뜻이다. 바로 희곡에서 나오는 ‘대통령 공장’이라는 의미다.
즉 ‘독재자 학교’는 독재자를 훈련시키는 곳으로, 14명의 독재자 후보들이 훈련을 받고
그중에서 몇 명이 독재자 대통령이 된다.
이는 독재자가 끝없이 악순환하는 정치현실을 풍자한 것이다.
국내 초연은 극단 배우극장에서 1990년 3월

작가의 글 - 에리히 캐스트너
이 작품은 계획한지 20년 만에 구성한 희곡입니다. 그때만 해도 저나 여러분 모두가 비참한 갈망과 경험을 같이 겪던 때였읍니다. 특히 독일의 경우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었던 점,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뒷다리로 껑충거리는 꼭두각시 옷을 입은 훈련된 개가 아주 굉장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가치와 양심을 물고 다니는, 인간처럼 위장된 그 훈련된 개들의 모습은 참으로 놀라운 바 있었읍니다. 말로 나타내기 힘든 것들올 써보려고 노력해 보았읍니다. 이 희곡은 풍자(飄刺)라고도 할 수 있겠읍니다만 결코 단순한 풍자만은 아닙니다. 자기의 만화(漫盡)를 알고 있는 인간올 과장없이 그려 보았을 뿐입니다. 물론 초상이 그려진 만화입니다. 그런 작품이 전통적으로 인사받을 만한 구실을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건 미지수일 뿐더러 의미를 붙이고 인물을 구별케 하는 대사의 중요성도 결정적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개성의 전개만이 문제일까요? 역시 아닙니다. 게다가 비극적인 갈등도 희미합니다. 뒷다리로 춤을 추는 강등된 인간에겐 그런 것들이 도대체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엄, 죄악, 또는 고뇌가 정화와 같은 고상한 드라마 작법상의 기둥들은 한쪽으로 밀어버렸읍니다. 이 기막힌 얘기는 우선 털어 놓는 게 중요하고, 그리고 새겨놓아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희곡입니다만, 혹자는 어떤 구체적인 고위층의 사건이나 정치적 문제의 부각으로 표지를 붙이려 듭니다. 물론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읍니다. 대체로 피비린내를 풍기면서도 우스꽝스럽기 이를 데 없는 독재란 훨씬 덕망 있다고 하는 폭동에 의해 제거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해서 실권을 잡은 반도들은 또 살해당하게 되는 것이고 다음 번 독재자가 들어 앉는 것이 순서입니다. 먼저 사람은 다음번 독재자를 위한 차량 역할을 합니다. 트로이아의 말처럼 말입니다. 두 개의 정권이 엎어지면 쿠데타의 고전적 규범에 따라 두 개가 새로 생겨납니다. 다만 구식 방법에 새 방법이 가미될 뿐입니다. 내란에 있어서도 현대무기란 게 사용이 된다는 점입니다. 옛날엔 호민관 한사람이 줄잡아 5천명의 군중에게 얘길 할수 있는 게 고작이었읍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일천만명에게 얘기를 합니다. 아니 천 만명 이상에게 얘기를 하느냐 아니면 중간에서 단추 하나를 누름으로써 아무에게도 한마디도 못하게 되느냐, 이렇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승리를 했다 해도 자기는 그것을 모르는 수가 있읍니다. 이럴 경우는 살아 있다고 믿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 지입니다. 그래서 쿠데타의 테크닉은 테크닉의 쿠데타로 헤아려집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이것은 오로지 한편의 희곡일 뿐이고 한가지 바램을 내포했을 뿐입니다. 구성계획이 20년이나 걸렸으니까 그 바램도 약간은 낡은 셈이 되지만 주제만은 낡지 않았읍니다. 만성적인 현실이 존재하니까요.

이 작품은 1956년에 에리히 캐스트너가 쓴 희곡으로,
인간성의 반복되는 조작 가능성과 정치 권력의 남용을 다룬다.
이 연극은 1957년 2월 25일 작가 에리히 캐스트너의 연출로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작가의 글에 따르면 이 희곡의 초기 버전은 1949년에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설명은 논란이 많다. 이 발표는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가 자신의 개인과 작품을
위해 반복적으로 수행한 "모험적인 홍보 활동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 작품의 국내 초연은 극단 배우극장에서 김학천 역 이창기 연출로
1990년 3월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됨.
당시 평은 아래와 같다.
사실주의적인 기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방법으로 접근했다. 물론 독재자들의 기형적
생김, 사이비 대통령들의 유형화된 동작 등은 연극적 재미와 함께 권력의 기형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우화적일 수밖에 없는 작품을, 설명적으로 처리한 방법이
진부하다고 느껴졌다. 예를 들어 국창(國娼)의 여자들의 행동이나 대사처리는
다른 어떤 작품에 등장하는 창녀 장면으로도 대치할 수 있다고 느껴졌으며,
쿠테타 이후 술집 장면도 그러하다. 술집 장면 같은 곳에서는 독재자의 사진들을
보관하면서도 환호하는 민중의 양면성과 민중이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는 혁명의
본질이 예시되며, 혁명의 절정기에 그 절망의 전조를 보여서 다음의 좌절을
준비시켜야 했다고 느껴졌다. 지나치게 잦은 암전도 어떤 연출의도를 가진 것 같지
않아서 거슬렸으며, 특기할 만한 연기도 없었다. 연극이 '예술이라는 전제와 사회적
대화형식의 하나라는 전제'를 추구했으며, 혁명에의 꿈과 좌절을 보여주었고,
지엽적인 정치풍자에 머물기보다는 지역성과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과 일반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국연극 '90년5월 평에서)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몰리에르 원작 재구성 '뻥짜귀족' (1) | 2026.01.21 |
|---|---|
| 훼르디낭 르메르 '삼손과 데릴라' (2) | 2026.01.20 |
| 유미리 '물고기들의 축제' (1) | 2026.01.19 |
| 버나드 쇼 원작 번안 '황토벌' (1) | 2026.01.18 |
| 재구성 음악극 '술로먼의 재판' (1) | 2026.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