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하얘, 다른 색이 없어."
히말라야의 해발고도 8,125미터 낭가 파르바트 등정에 성공한 두 형제가
하산도중 죽음의 골짜기에서 기상악화에 휘말린다. 서쪽의 디아미르 벽을 통해
하산코스를 바꿔 내려오는데 후발대를 향한 구조요청마저 무산되어 고립된 채
눈보라와 산소부족의 호흡곤란, 눈에 반사된 태양빛 등 모든 것이 악조건이었다,
설맹에 걸린 동생의 의식은 흐려져간다.
어느 순간에 동생이 눈도 쾌청하게 보이고 컨디션이 좋아졌다 하는데
아마 이때부터가 형의 환상에 보이는 동생의 모습이다.
오히려 의식을 잃으려는 형의 가이드가 되어 농담도 걸고 옛날 얘기도 하고...
바다에서 풍랑을 겪으면서도 이겨내는 장면도 나온다.
그리고 형은 기적적으로 하산한다.
"너 대신 살아남은 게 왜 나야?"

파린은 장소의 감각을 상실함이란 뜻이다. 그런 상태가 되면 정신적으로 심한
혼란에 빠져 눈앞이 캄캄해져 버리는 것이다. 동생이 먼저 혼란에 빠져 죽게 되고
형도 동생을 잃은 상실감에 서서히 의식이 희미해질 때 말을 걸어와 그 파린에서
빠져 나온 것으로 이 작품에는 1, 2막은 낭가 파르바트에서 3, 4막은 다르다.
바다 한복판에서 구조선을 기다리는 오빠와 여동생의 에피소드와 산에서
조난당한 언니와 여동생의 이야기. 보트가 바다의 조류에 휩쓸린 누나와
남동생의 이야기. 남여의 이야기 등이 나온다.
막간극도 2편 삽입되어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또 재난과 전쟁의 시대에 우리의 안온한 일상이 위태롭게
겹쳐져 있다. 죽음을 직면한 게 자신일 수도 있었다는 공포감, 그럼에도 그게
자신이 아니었다는데서 오는 안도감이 뒤섞인다. 거리가 멀어질 수록,
시간이 지날 수록 이 안도감에서 오는 죄책감은 흐려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세계가 연결되었다는 감각과 함께 우리의 일상 안에 송곳처럼 자리하고 있다.
하늘을 수놓는 미사일에 매일 수천명씩 죽어나는 일은 우리에겐 비극이지만
죽은이들에게는 현실이다. 재난의 복판이 된 축제의 거리에서 죽어간 이들에게
안온한 삶을 이어가는 우리의 일상은 판타지이다. 타인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가
겹쳐져 있는 것처럼, 우리 각자도 판타지와 일상과 비극의 세계에 거짓말처럼
겹쳐져 있다. 일상에서 방향을 잃은 듯한,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무력감의 순간에
그 겹쳐진 세계가 드러난다. 이러한 관점을 이 작품 '파린'에서 보여준다.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는 히말라야산맥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고도가 8,125m로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높은 산이다. 8,000m 이상급 산 중에서는 가장 무섭다고 손꼽히는 곳. K2도 무섭지만 이쪽은 히든 보스인 셈이다.
1970년,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가 동생 귄터와 단둘이 최초로 루팔 남벽을 통해 등정하는데 성공했다. (참고로 이 코스는 당시 사망률이 80%에 육박하는 최악으로 위험한 코스였기에 그후에 계속 실패하다가 2005년에 김창호, 이현조로 구성된 한국팀에 의해 35년 만에야 비로소 재등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쪽의 디아미르 벽을 통해 하산하던 중 눈사태로 동생 귄터를 잃고 혼자 내려왔다. 이때 대장인 헤를리히코퍼는 동생 메스너가 영광을 차지하는 게 배가 아파서 메스너가 기록을 세우기에 급급해 정상에 오른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고산병에 시달리는 동생을 강제로 더 위험한 루트로 내려보내다 죽인 거라고까지 했다. 분노한 메스너는 "나는 내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히며 헤를리히코퍼를 공식적으로 비난했다.

이 등정을 그린 2010년작인 독일 영화 <운명의 산 낭가 파르밧>(2013년 국내개봉)에서도 헤를리히코퍼는 찌질이 악역급으로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메스너 형제가 정상에 오르기를 적극 지지했으나 실제로 이들 형제가 정상에 오르자 태도가 돌변했다고 그려졌다. 낭가파르바트의 모습과 등반에 대한 정보는 <벌거벗은 산>(라인홀트 메스너)을 참고하였고, 라인홀트 메스너가 낭가파르바트에서 동생을 잃은 사건을 사용하였으며, 산에서 동생을 잃있다는 설정과 하산할 때의 상황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모두 창작이라고 작가 전성현은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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