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편의점에서, 시장에서, 골목길에서,
또 이와 비슷한 수많은 장소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지나치며,
여행에 대해, 연봉에 대해, 애완동물에 대해, 생일 잔치에 대해,
또 이와 비슷한 여러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너무나 사소해서 기억조차 뚜렷하지 않은 순간들.
하지만 이 거대한 도시를 채우고 있는 것은 늘 이렇듯 사소한 순간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순간들 덕분에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겠다. 하나의 도시, 천만 개의 삶.
나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도시도 거대하기에, 우리가 만날 땐
언제나 서로의 세계 속에서 길을 잃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그 사소한 순간들에 조금 더 관심을 준다면,
수많은 길잃음 속에서도 하나의 도시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서울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새로운 연극을 보여준다.
서울을 이야기하는 공연들은 지금까지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연극은 아마도 처음 일 것이다.
그만큼 새로운 내용과 구성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서울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했어요. 같지만 다른 서울.
남산타워 버스정류장 한강 골목길 63빌딩 공원 광화문 놀이터 야경 마트...
우리는 각자 다른 순간을 살고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어떻게 하나의 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느끼는 걸까요?
1년간의 사전 준비 기간을 거치고 4개월간 진행된 18명의 시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서울에서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지나가다 만난 강아지, 출근길의 버스, 헤매던 골목길, 친구와의 대화들...
누구나 잠시 스쳐지나간 삶의 순간들을 무대위에 펼쳐 놓는다.

<천만 개의 도시>는 그 제목처럼, 한 때 인구가 1000만명에 육박했던 거대 도시
서울을 이루는 무수한 삶의 순간들에 집중한 연극이다.
이 연극엔 주인공도, 뚜렷한 서사도 없다. 여러 명의 배우가 행인 등 평범한
사람들부터 연못의 잉어, 새, 고양이까지 100여개의 캐릭터를 연기한다.
공연이 시작되면 우리가 수없이 일상에서 마주한,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일상적인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무대는 도시의 축소판이다. 평범한 버스 정류장과 일정한 도시 소음이 들리는
지하철 안, 층간 소음이 울리는 다세대 주택, 입시학원과 코인 빨래방, 광장과 공원,
시멘트를 뚫고 자란 잡초가 싱그러운 기운을 뿜어내는 어느 골목의 담벼락까지.
연극은 이 모든 공간을 암전 한 번 없이 한 무대 위에서 구현한다.
그 안의 대화들도 너무나 사소하고 흔해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다.
둘셋씩 짝을 이룬 배우들은 연봉 걱정이나 틀어진 여행 계획, 순대를 소금에
찍어먹는지 아니면 쌈장에 찍어먹는지, 헬스장에서 개인지도(PT)를 받을지 말지
따위의 대화를 쉼 없이 이어간다. 완결성 있는 서사,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연극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낯설게 느낄 수 있다.

결국 연극이 보여주는 것은 일상 그 자체다.
골목길을 걷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는 연극의 주제 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몇백년 쯤 지난 뒤 사람들은 지금을 ‘스티브 잡스의 시대’로 기억할지 모르지만,
어떤 시대를 제일 잘 말해주는 것은 한두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그냥 자기 삶을
살았던 사람들”, “물처럼 이렇게 흐르는, 우리 같은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집중해 서울의 풍경을 한 폭의 세밀화처럼 그려보인다.
전성현 작, 박해성 연출, 서울시극단에서 2021년 9월 세종M씨어터에서 공연했다.

47개의 장면에 각 장면에 2, 3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공연에서는 13명이 멀티역으로 함)
장면제목(가나다 순)과 등장인물 의 수는 다음과 같다.
거실(동거인1, 2) 게스트 하우스(투숙객, 헬퍼), 고속버스(승객1, 2) 골목길(행인1, 2) 공연장(관객1, 2) 광장(행인1, 2) 놀이터(아이1, 2) 다세대 주택(주민1, 2) 담벼락(학생 1, 2) 마로니에 공원(주인, 반려견) 마을버스(승객1, 2) 마트(고객1, 2) 배드민턴 장(이용객1, 2) 버스 종점(승객1, 2) 버스 정류장(취객1, 2) 베란다(고양이, 개) 부엌(주인, 손님) 비상계단(직원1, 2) 빨래방(손님1, 2) 사무실(회사원1, 2) 소품 가게(사장, 손님) 쇼윈도 앞(행인1, 2) 술집 입구(선배, 후배) 스터디 카페 앞(고시생, 새) 시내버스(승객1, 2) 시장(손님1, 2) 식당(손님1, 2) 야외 운동시설(운동객1, 2) 엘리베이터 앞(고객1, 2) 연못(잉어, 행인, 비둘기) 옥상 테라스(흡연자1, 2) 인도(행인1, 2) 입시학원(학생1, 2) 작은방(고양이, 사람) 정자(행인1, 2) 주차장(운전자, 동승자) 지하상가(행인1, 2) 지하철 플랫폼(승객1, 2) 천변 산책로(산책자1, 2) 카페 앞(손님1, 2) 캠퍼스(선, 후배) 코인노래방(손님1, 2) 택시 뒷좌석(승객1, 2) 편의점(손님1, 2) 헬스장 상담실(트레이너, 회원) 화장실(주인, 손님) 횡단보도(행인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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