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전성현 '엑스트라 연대기'

clint 2025. 12. 25. 11:06

 

 

일제강점기, 독립을 외치는 여자가 나무 전주 꼭대기를 점거한다. 
나무 전주 위에서 그녀는 다른 독립군들처럼 만주로는 가지 않겠다 결심하고 
기차표를 날려버린다. 그 대신 조선에 남아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빠짐없이 기억하겠다 다짐한다. 
1930년, 한 독립군의 점거는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행위로 이어진다. 
탄약고를 점거한 병장, 화장실을 점거한 어용노조원, 
고해실을 점거한 가톨릭 신자, 옥탑방에 틀어박힌 대학생, 
공장 지붕에 모인 노동자들, 개발을 막으려 나무 위에 올라간 활동가... 
잠수함에서 함장실을 점거하고 권력에 저항하는 한 병사...
100여년의 시간을 건너뛰고, 400km의 공간을 넘나들며, 
점거자이거나 점거자가 아닌 이들 엑스트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프롤로그에 나왔던 전주에 올랐던 여자는 객석(혹은 백스테이지)에서 
모두 보고 에필로그에 다시 나온다. 시간은 100년이 흐른 2030년대.
순경말로는 시장공관을 넘겠다고 농성을 하다 잡혀왔고...
구치소 TV를 통해 그 일들을 다시 보며 그들 곁으로 퇴장한다.



2022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으로 선정된 전성현 작가의 이 작품은 
‘점거’를 키워드로 한국 현대사의 노동운동을 다루며, 1930년부터 2030년에 
이르기까지 100년을 넘나드는 한국 근현대사를 역사적 배경으로 두고 있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는 플롯을 전면 거부한다는 점이다. 
인물 대신 시공간이 등‧퇴장한다는 설정, 한 배우가 다역을 연기하는 등 
전환의 경계선을 허무는 구성을 선보인다. 
“연극 장르의 형식에 대한 도전”이라고 소개한다.
100여 년의 시간과 400km의 공간이라는 드넓은 배경 속에 존재하는 
에피소드들은 장면의 전체 구조를 통해 하나의 점거 공간으로 중첩된다. 
극단 그린피그의 윤한솔 연출로 공연된 이 작품은 한국사회를 ‘점거’라는 
키워드로 들여다보며 시대를 초월한 연대의 정신을 포착하고자 한다.



'점거'란 어떤 장소를 차지하여 사는 것이라 정의되어 있다.
한국 노동현장에서 점거 행위는 오랜 역사를 가진 투쟁방식이다.
일제시대 노동자 강주룡의 을밀대 점거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크고 작은 현장에서 수많은 점거가 이어지고 있지만 그 행위의 절실함에도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점거자들은 현장의 어려움에 더해 
고립의 아픔까지 느껴야 했다. 현실의 점거가 성공을 거둘 확률은 극히 적고, 
이해받을 공간도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시대를 초월한 정신의 
연대가 가능해지기도 한다.
이 작품은 2011년 미국의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에서 촉발되었다. 
시위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많은 이들이 체제의 불합리를 인식하고 있음을 
공유하는 계기가 되었고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점거 현장의 연대는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일어남을 생각하며 
이러한 연대의 풍경을 포착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큰소리쳤던 대로 무대 위에서 관객이 되어 연극을 내내 지켜보던 여자 독립군은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에게 화를 잔뜩 내더니 무대 밖으로 나가버린다.

100년 동안이나 자기가 관객인 줄 알았더니만, 알고 보니 배우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관객석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가며, 극장 불까지 꺼달라고 한다.

그런데 독립군의 ‘관객이 아니라 배우였다’는 깨달음은 사실 <엑스트라 연대기>의

관객이 연극을 본 후 깨닫게 되는 바와 같다. 공연 내내 독립군과 관객은 100년간의

연대기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지켜보는 똑같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니 그녀가 배우라면, 관객 역시 관객이자 배우여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배우가 되며, 관객을 배우로 만들며,

세계를 극장으로 만들며 극장을 성큼성큼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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