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배삼식 '하얀 앵두'

clint 2025. 12. 24. 08:00

 

 

가을, 강원도 영월에 반아산이 전원주택을 얻어 내려온다. 50대의 잊혀져 가는 작가인

그는 텅 빈 마당을 보며 하얀 앵두가 있던 할아버지의 정원을 복원하고자 한다.

어느 날, 이 집의 늙은 개 원백이가 동네 암캐를 겁탈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암캐 주인인 곽지복 노인이 노해서 반아산의 집에 들이닥친다. 곽 노인은 이 집 마당의

개나리 고목이 어떤 나무인지를 순간적으로 알아본다. 그리고 과거를 회상한다.

하얀 앵두와 함께 극의 흐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삼엽충 화석 이야기이다.

이 화석은 5억년이라는 긴 세월의 여행을 한 후 영월 땅에서 발견된다.

작가는 그러나 이 화석을 통해 우리의 인생이 짧고 덧없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오히려 소소한 일상에 따뜻한 시선을 던진다. 지질학 교수 권오평의 농담을 순진하게

말 그대로 믿은 곽 노인은 그 화석을 조급증을 치료한다며 빌려간다. 원백이의 회춘을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기뻐하는 반아산, 윤리선생의 아이를 가진 고등학생 딸을 얼싸안고

위로하는 반아산의 부인 하영란, 짝사랑하는 권 교수에게 "난 개야. 쓰다듬어 줘.

착하고 예쁘다고 말해줘."라며 술주정을 부리는 대학원생 이소영.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잔잔하면서도 웃음을, 때로는 가슴 뭉클한 느낌을 주며

2시간 동안 지루함 없이 흘러간다.

 

 

 

개 겁탈 건이 해결될 즈음 딸 반지연이 사고를 친다. 고교 2학년 딸이 34살 윤리 선생과

눈 맞아 벌써 임신 5개월이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무릎 끓고 마당에서 용서를 비는 자, 그를 향한 육탄전 및 욕설 언어가 예기치 않는 순간

터져 나온다. 신사 같던 반아산이 갑자기 저급한 헐크로 돌변한다.

무대가 순간 역동성을 발하기 시작한다. “저놈 좆 뿌리를 뽑아 부려야 해”.

농탕한 강원도 토종 욕설 사투리, 예기치 않은 행동과 반응 공간의 차별화,

여기에 속도의 완급이 가세하면서 익살과 반전의 놀이 묘미는 일순간 극대화된다.

이 연극의 최대 매력은 개로 분장한 배우의 연기라 할 수 있다.

코너에 몰려 허우적거리면서 자신의 집주인 구원을 요청하며 재빨리 그의 등 뒤로

도망가 숨는 제스처, 화가 풀린 영감의 모습에 화답하며 넉살과 애교를 부리는 그림,

능청과 익살의 매력을 무한대로 발산한다.

지질학 답사 학생들을 인솔하여온 교수 권오평과 그를 은근히 좋아하는 조교 이소영,

맨 정신으로 차마 말하지 못하고 술 취한 채 터트려내는 오소영,

이들의 속내 드러내기 연극놀이 역시 재미와 활력을 준다.

 

 

 

뜯어보면 모든 등장인물에게 상처가 있다. 아산은 건강을 잃었고, 지복은 가족이 없고,

지연은 입양아고, 오평은 상처(喪妻)했고, 오평의 조교 소영은 오평을 짝사랑한다.

작가와 연출은 무대에 시간의 힘을 구체화하면서 이 결핍을 채워나간다.

때론 매를 대고, 싸우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지만 나무를 심고, 물을 뿌리고,

겨울이 가고, 봄꽃이 피면서 그들은 화해한다.

원백이란 개가 죽음을 맞이한다. 개의 마지막 임종, 이를 상기시키기 위한

할머니 혼백 등장, 죽어가는 개의 속마음을 읽고 위로하는 자, 인생 관조자의

품격이 자연스레 우러나온다. 원백이 낳은 강아지를 보며 위로 받는 가족들,

탄생과 죽음의 순환, 이게 인생의 본질임을 알아차리는 자들, 마당 텃밭에

나무 모종을 하나 둘 심기 시작하면서 가족들은 새롭게 눈을 떠간다.

애잔함과 가슴앓이의 가족 공동체 인생사, 이를 잔잔한 서정 언어 및 질펀한 욕설

기호 그리고 술주정 및 저작거리 등 잔잔하면서도 여운을 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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