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년의 평범한 회사원 원일. 그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슬픔과 죄책감에 빠져 있다.
명퇴 사실을 숨기고 3년 동안이나 출근하는 척, 집을 나와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친구. 원일은 최소한의 도리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친구가
시간을 보냈다는 공원 벤치에 앉아 그가 남긴 다이어리를 읽기 시작한다.
그런 원일의 주변을 서성이는 중년의 주부, 지영. 자신에게 볼 일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에게 관심이라도 있는 것인지
의아해하는 원일. 실은 지영이 원일의 주변을 서성인 것은 그가 앉아 있던
공원 벤치 때문. 그녀는 자리를 비켜줄 수 없겠느냐고 묻는다.
무례하기까지 한 지영의 부탁에 황당해하는 원일. 그는 지영이 얼마 전 모친을
잃었다는 것, 원일의 친구처럼 지영의 모친도 이 공원 벤치에 나와 외롭게 시간을
보냈다는 것, 그리고 원일과 마찬가지로 지영도 이곳에서 모친이 못다한 뜨개질을
완성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정은 딱하지만 그 역시 상실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터라 벤치를 양보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벤치는 하나, 사람은 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공원 벤치를 공유하게 되고……
만남을 거듭함에 따라 상대방의 슬픔에 대해서도 공감하게 된다.
누구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하던 자신들의 유별난 추모 행위를 이해해줄
유일한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 이해해주는 상대를 만나 마음 놓고
슬퍼하고, 후회하고, 자책할 수 있게 된 그들, 서로에게 이성으로서 끌리게 된다.
마침내 두 사람은 육체관계까지 결심하는데……

벗과 어머니를 추념하는 남녀가 만나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 2인극으로
2020년 월드 2인극 페스티벌 희곡상 수상작품이다.
친구의 자살에 충격을 받은 남자 원일과 돌아가신 엄마를 추억하는 여자 지영이
공원에서 마주친다. 그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두 사람에게 그곳은 공동의 애도 장소이다.
원일과 지영이 나란히 앉게 되면서 무대의 공기는 바뀐다.
관객은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망자에 대한 후회와 미안한 감정이
옅어짐을 감지한다. 위로의 시간이 찾아온다.

원일의 친구가 죽기 전 3년 동안 머물렀던 벤치는 병마에 시달리던 지영의
어머니도 즐겨 찾던 장소다. 그들이 그곳에 남긴 흔적은 산 자의 기억 속으로
현전(現前)한다. 원일의 일기장 낭독과 지영의 뜨개질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애도 작업이다. 그렇지만 장소를 공유한다고 해서 마음속 응어리가
해소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마치 우주에 흩어진 원자와 같아서 저마다의 궤적이
있고 상실의 농도나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다. 원일과 지영은 사연을 공유하는
사이로 발전하지만, 매일의 만남에서 기대하는 바가 달랐다.
‘슬픔’은 객관적이고 ‘슬퍼해야’ 할 대상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차이를 확인하고 좌절한다.
이윽고 벤치만이 홀로 남아 이별의 아픔을 증언한다.

<공원 벤치가 견뎌야 하는 상실의 무게>에는 '진실'이 갖는 힘을 조명하는
인상적인 대화가 있다.
지영: 사실 기쁜 거잖아요? 엄마가 마지막에 친구가 있었고, 외롭지 않았고,
사진 받으려고 기대했었고..
원일: 제 친구도요. 제가 생각한 것처럼 외롭게 간 게 아니네요.
지영: 기쁜 얘기에요. 사실은 이게
원일: 예, 맞아요. 기쁜 얘기 맞아요.
이 장면은 미묘하다. 고인(故人)들이 지영과 원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덜 불행했음을 알게 된 것은 향후 두 사람에게 어떻게 작용할까?
지영과 원일은 이제 벤치에서 벗어나 일상생활로 복귀할 것인가.
기쁘다니? 두 사람이 몰랐던 진실이 드러난 여파가 다소 모호하게 그려지면서
그들의 관계가 복잡한 줄다리기 양상을 보일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 일을 계기로 지영과 원일이 공감대를 형성하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는
점이 중요해진다. 진실의 '앎'이 때로는 작은 위안과 치유를 찾는 과정임을
암시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작가의 글 - 신성우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거짓'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슬픔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고, 슬픔을 느낀다고해서,
나의 슬픔자체가 반으로 줄어들 논리적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슬픔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이되어
감염자가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일 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슬퍼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
과연 사회 전체로 볼 때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슬픔은 다른 사람에게로 전이되는 순간,
종종 그 강도도 줄고 초점도 흐려지게 됩니다.
아무리 깊이 이해해준다해도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느끼는 슬픔은
당사자의 그것과 같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것이 당사자의 냉소를, 더 나아가 분노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기쁨을 공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슬픔을 공유하는 것도
나와 다른 사람을 이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는 다른 사람들과 기능적으로 조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불완전하다고 할지라도 공감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회적 비극에 대한 공감도 마찬가지입니다.
멀리는 삼풍백화점 사건에서부터 세월호 사건까지
우리는 유가족들이 느낀 상실의 무게를 온전히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꾸역꾸역 작은 슬픔의 조각이나마 가슴에 품고,
또 그걸 옆으로, 옆으로 전이시키려하는 것은
그 슬픔의 조각들이 우리 사회를 하나로 이어주는 접착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나나 너가 아니라 '우리를 주어로 내세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마당극 '우리동네 갑오년' (2) | 2025.11.25 |
|---|---|
| 창극 '하늘에 핀 녹두꽃' (1) | 2025.11.25 |
| 박태환 '아무것도 하지 말라' (2) | 2025.11.23 |
| 황석영 '산국' (1) | 2025.11.23 |
| 박수진 '용병' (1) | 2025.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