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신성우 '어메이징 그레이스'

clint 2025. 11. 12. 21:07

 

 

‘그레이스’는 매력적인 미술품 사기범이다.
그레이스와 그녀를 처벌하려는 검사, 그리고 자신의 사회 운동을 위해 
그녀를 석방 시키려는 변호사가 벌이는 치열한 공방전을 다룬 연극이다.
재벌가 사모님들에게 고가의 위작을 판매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그레이스라는 아트 딜러를 취조하게 된 검사. 
그는 기본적인 신원확인을 거부할 뿐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작품은 
위작일 수 없다는 둥, 가짜는 스스로가 가짜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둥 
궤변을 늘어놓는 그레이스 때문에 궁지에 몰린다.
그레이스를 돕겠다며 나선 변호사는 저열한 물질만능 자본주의 사회에 
일격을 가했다며 그녀를 성녀로 만들려고 한다. 그 역시 사회 운동에는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려 하지 않으며, 
자신의 합의 제안도 거부하는 그레이스의 태도에 질리고 만다.
자신을 벌하려는 사람과 도우려는 사람, 양쪽 모두를 거부하는 그레이스. 
그녀는 세상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만을 따른다.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온 그녀는 이번에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선택의 기로에 선 예술가가 겪어야 했던 고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그래서 완벽하지 않은 진품의 삶을 살고 있냐고, 아니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그려진, 하지만 솜씨 좋은 위작인, 그런 삶을 살고 있냐고.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진실과 거짓이라는 주제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작품이다. 작가 신성우는 여기서 진짜와 가짜의 문제를 예술 (진품 vs.  위작)과 법 (진실 vs. 거짓)의 두 영역에 걸쳐 이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레이스와 검사 모두 자신의 욕망, 상처, 또는 감당하기 힘든 현실 앞에서 진짜를 외면하거나 부정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편리한 가짜 현실 혹은 진짜 논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때로는 진짜를 끝까지 추구하거나 숨겨진 진짜를 발견함으로써 반전이 거듭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가짜=완벽'은 역설이다. 두 단어를 조합하면 '완벽한 가까'라는 모순어법이 된다. 그레이스의 주장이 그럴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완벽한'이 인간의 주관적 욕망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실에 만연한 욕망이 얼마나 삿된 것인지를 비판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그레이스는 "잔 다르크는 너무도 허황되게도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기로 한 거죠.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욕망하는 걸로 끝난 게 아니라, 남들도 가지지 못한 걸 욕망한 거예요. 명품백 들고 수입차 타는 건 욕망이 아니에요. 그건 변명이에요. 사실은 나 잘살고 있어, 이걸 봐봐. 나 잘살고 있는 것 같지? 그런 변명이라고요! 진짜 욕망은 관습적인 것을 원하지 않아요! 진짜 욕망은 현실의 꿈 따위는 꾸지도 않는다고요!"라고 역설한다.

 

 

 

그레이스의 주장은 가짜가 순수해서 잘 먹힌다는 변호사의 논리와 완벽히 짝을 이룬다. 진짜는 증명해야 하고 가짜는 증명할 수가 없다는, 그래서 가짜는 완벽하다는 그레이스의 주장을 부정했던 검사 입장을 변호사는 뒤집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가짜순수'라는 변형 명제를 도입한다. '완벽'과 '순수'는 어떻게 다를까? 진 짜가 완성도와 관계있다면, 후자는 선악 판단의 문제이다. 선악 이분법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예술은 삶의 문제, 곧 욕망으로 전환된다. 작품의 주제가 예술을 넘어 삶의 진실성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이로써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궁극의 질문을 완성한다. 가짜 예술품을 취급했던 그레이스의 삶은 선(善)한 것인가? 그녀가 액자 프레임으로 걸어 들어가 그림이 되는 피날레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암시한다. 그레이스는 처벌받지 않는다. 그녀는 세속적 욕망에 젖은 사람들을 이용해 법망을 지나갔을 뿐이다. 어느덧 그레이스의 냉소에 지지를 보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우리가 사는 물질문명 사회에서 절대적인 도덕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직 남짓으로서의 욕망만이 순수하다는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작가 신성우

1971년생으로,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했다. 40대에 뒤늦게 연극에 입문한 늦깎이 작가다. 오로지 글만 쓰는 극작가로서 평생 현역으로 살다가 죽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폭설>, <고향 마을>, <남작 부인>, <창밖의 여자>, <어메이징 그레이스>, <공원 벤치가 견뎌야 하는 상실의 무게>, <나무는 서서 죽는다>, <운수 좋은 날> 등의 연극, <하우스키핑>, <얼라이브>, <마이너리그> 등의 뮤지컬, <새가 숨는 집>이라는 오페라의 대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