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어령 작 모노드라마 '오! 나의 얼굴'

clint 2025. 11. 12. 04:47

 

 

사진관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얼굴이 찍히지 않는 사건을 통해서 인간성 상실의 문제를 다룬 모노드라마이다.

1985년 극단 실험극장에서 초연(송미숙 연출, 이승호 1인 모노드라마)

 

 

제1막
사진사는 아침 일찍 사진관을 청소하며 총채로 먼지를 터는 중이다. 그때 손님이 들어오고 사진사는 잠시 기다릴 것을 부탁하며 손님에게 자리를 권한다. 사진사는 청소를 계속하면서 손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수다스럽게 한다. 사람 이름을 자꾸 까먹어서 지난 번 호구조사 때는 마누라 이름이 생각나지 않더라는 얘기. 렌즈에 먼지가 있거나 필름을 현상할 때 먼지가 한 올이라도 있으면 사진을 망치기 때문에 사진사는 항상 먼지를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 사진사는 어느 정도 먼지를 닦아 내자 그제야 사진 찍을 준비를 한다. 손님은 여권용 사진을 부탁한다. 그리고 ’’펑 소리가 나는 사진기’’ 즉, 마그네슘을 쓰는 사진기로 찍어 줄 것을 덧붙인다. 그러자 사진사는 친구에게서 들었던 사고 이야기를 손님에게 해준다. 한 사진사가 마그네슘을 잘못 터뜨려 손님 얼굴에 온통 화상을 입혔었다. 그래서 그 손님은 성형수술을 심하게 받았는데 전화위복이 되어 아주 못생겼던 사람이 미남자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아내는 남편이 실종되었다고 생각했고 얼굴이 변한 남편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남편은 자신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다. 그렇지만 아내는 여전히 남편을 알아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남편은 매일 밤 몰래 숨어서 울타리를 빙빙 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남편은 묘안을 생각해 냈다. 자기를 증명하는 방법을 포기하고 아예 딴 사람으로 아내를 유혹한 것이었다. 결국 그 남자는 같은 여자에게 두 번 장가를 들게 되었다. 이런 얘기를 들은 손님은 전기 조명으로 할 것인지, 마그네슘으로 할 것이지 잠시 망설인다. 하지만 결국 마그네슘으로 찍을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손님은 시골 풍경이 있는 사진 한 장을 더 찍기를 원한다. 사진사는 여러 시골 배경들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시골 고향 얘기를 해준다. 그리고 손님의 포즈를 요리조리 조정하고 마그네슘을 이용해 풍경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펑 소리에 손님이 놀라자 여권 사진은 전기 조명으로 찍는다. 

 


제2막
인화된 사진을 보면서 사진사는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다. 사진에 얼굴이 안 찍혔기 때문이다. 조간 신문에는 그런 사실이 기사로 실리고, 신문사에서는 계속해서 원인을 묻는 전화가 온다. 하지만 사진사는 자신도 그러한 괴변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다. 그때, 맡겨 논 사진을 찾으려고 A손님이 들어온다. 하지만 그 사진 역시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나와 있지 않는다. 화가 난 손님은 사진사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곧 B손님이 들어오고 얼굴이 나와 있지 않은 사진을 보더니 그 손님 역시 사진사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사진사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며 방금 본 신문을 증거로 보여준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문에 있던 그 기사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사진사는 화가 난 손님들을 진정시킬 방안을 강구해 내지 못하고 쩔쩔맨다. 그때 C손님이 들어오지만 그 손님의 사진에도 역시 사람의 얼굴은 없다. 손님들에게 둘러싸여 어쩔 줄 모르던 사진사는 마침내 한 가지 해결 방안을 생각해 낸다. 다른 사진관에 전화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사진관의 사진들은 모두 정상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사진을 찾으려는 손님들이 몰려들고 사진사는 손님들을 모아 놓고 12시 정오 뉴스가 시작되길 기다린다. 마침내 뉴스가 시작되지만 얼굴이 나타나지 않는 사진에 대한 얘기는 없다. 그러자 화가 난 사람들은 사진사를 구타하고 나가 버린다. 사람들이 모두 가 버린 뒤 라디오에서 긴급 뉴스가 나온다. 바로 사진사가 애타게 기다리던, 얼굴이 안 찍히는 사진에 대한 뉴스였다. 사진사는 손님들을 불러오기 위해 사진관을 뛰쳐나간다. 

 


제3막
사람들과의 소동이 있은 지 3-4일이 지난 날. 사진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사진틀들을 만진다. 집안 대대로 사진을 찍어 왔기 때문에 사진틀 하나 하나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있고 사진사의 추억이 담겨 있다. 그 사진틀들을 어루만지며 사진사는 이제 더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기에 우울해 한다. 그때 지난 번 여권용 사진을 찍은 손님이 들어온다. 그리고 손님의 이름은 ’’윤길호’’라며 자신을 소개한다. 그 손님의 사진 역시 얼굴이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는 얼굴이 나와 있다. 사진사가 의아해 하고 있을 때 손님이 말한다. 지난 번 얼굴에 화상 입은 사람의 얘기가 바로 자신의 얘기라고. 사실 아내는 남편을 알아봤었다. 아내는 그때 의사들과 공모를 해서 남편의 얼굴을 아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었다. 하지만 아내가 원하는 잘생긴 얼굴로 바뀌었는 데도, 정작 남편 자신은 불행했다.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과거와는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낯선 외국으로 도망쳐 새로운 생활을 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사에게서 들은 고향 얘기는 자신의 고향과 비슷했다. 그리고, 그 옛날 고향과 새로운 자신의 얼굴이 일치되는 순간 새얼굴과 옛 얼굴은 하나가 된 것이다. 손님은 자신의 얼굴이 찍힌 사진을 받아 들고 가게를 나간다. 그리고 사진사는 이제 다시 사진을 찍을 수 있음을 기뻐한다. 얼굴이 안 찍히는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옛날의 얼굴들, 즉 시간 속에서 사라진 얼굴들이 열쇠였다. 한 순간의 얼굴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시간들을 강물처럼 흐르게 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사는 사진기 앞에 앉아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고향의 향수를. 그때 자동 셔터가 돌아가고 플래시가 계속해서 터진다. 

 

 

 

<오! 나의 얼굴>은 유희하는 언어를 위해 플롯이 뒤로 물러나 있는 형국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부조리한 상황에 쫒겨 언어 유희에 몰두하게 되거나 

아니면 언어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현실의 부조리를 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유일한 희곡집 <기적을 파는 백화점>이 1984년 갑인출판사에서 초간 된 후 2003년 문학사상사에서 재출간되었다. 공연 연보를 보니 1976년에 초연된 표제작에서부터 1979년에 초연된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당신들이 내리지 않는 역>은 잘 짜여진 플롯이 작동하고 있으나, 표제작과 <사자와의 경주>․<오! 나의 얼굴>까지 5편이 들어있고 모두 공연된 작품이다. 이어령 희곡의 특징은 사실주의적인 전제를 거부하며 극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 극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도저히 현실 같지 않은 관념적인 상황 제시와 언어 유희라 할 수 있겠다.

이어령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