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대는 저승 심사구역.
영혼들은 심사를 거쳐 천국행? 지상행으로 분류된다.
저승으로 흐르는 수로를 통해 매일 새로운 영혼들이 도착하고,
영혼들은 천사장의 몇 가지 질문을 통과해야 한다.
영혼들은 당연하게도 천국행을 희망하지만 그들의 희망과는 달리 대부분
다시 지상으로 환생한다. 오랫동안 천국의 문을 연 영혼은 없었다.
이 구역은 영혼의 환생과 천국행을 심사하는 천사장, 그리고 환생하는 영혼을
지상으로 보이는데 사용되는 요람을 만드는 곱추천사가 지키고 있다.

어느 하루, 장마철 악천후로 지상으로 요람을 내보내는 작업이 금지된다.
환생이 결정된 영혼들은 대기실에서 이 밤을 보내야 하고,
그들은 코앞에 있는 천국의 문에 강렬한 유혹을 느낀다.
천사장은 인간 세상에 대한 곱추천사의 동경과 호의를 통제하기 위해
영혼들 사이에 천국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고, 곱추천사에게 인간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목격할 수 있도록 일을 꾸미는데……. 영혼들은 천국행 티켓인
황금 깃털을 구하기 위해 곱추천사를 희생시키려 하지만…….
곱추천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상의 삶을 선택하고,
천사장만이 고독 속에 홀로 남는다.

왜 환생구역인가. 이곳에 도착한 영혼들은 오직 두 갈래의 길에 선다. 환생과 영원. 지옥은 없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인간의 욕망과 환생에 대한 또 다른 은유일 뿐이기에. 왜 인간들은 천국을 꿈꾸는가. 천국을 꿈꾸는 것. 인간의 삶이 끝나는 부분에 있어 가장 큰 마지막 욕망. 그것은 결국 이승과 다름없는 또 다른 삶의 반복을 꿈꾸는 것일 뿐. 천국이라 이름 붙인 그곳이 생명의 모든 연연함과 고통뿐 아닌 기쁨까지도 삼켜 버리는 무의 아가리라면, 그대 천국을 꿈꾸겠는가. 끈을 놓을 수 없는 세상... 결국 어느 고전의 한 대사처럼 “천국은 너의 절반, 아니 지상에서 숨 쉬는 어떤 인간의 반보다도 아름답지 않다”. 이 작품은 환생구역이라는 공간을 통하여 삶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지상의 삶을 마치고 이곳에 도착한 영혼들에게는 물론이요, 이곳을 지키며 오랜 세월을 살아온 천사장과 곱추천사에게도 천국은 자신들의 삶 앞에서는 결코 열리지 않는 거인의 정원일 뿐이다. 그들은 모두 천국을 꿈꾸고 욕망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욕망의 또 다른 반사일 뿐이라는 것을 다른 영혼들은 알지 못한다. 단지 천사장과 곱추천사만이 이 비밀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미 천사장은 오랜 세월의 기다림에 지쳐 삶에 대한 욕망마저 잃어버리고 이제 그 욕망 자체를 거부하며 살아간다. 반면 곱추천사는 결국 지상을 택함으로 삶에의 욕망에 자신을 던진다. 지상의 삶은 아름답지도 비옥하지도 않으며 아무런 약속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인간이기를 욕망하기에 슬픔 속에서 기쁨을 찾고 고통 속에서 노래 할 수 있다. 칼로 후벼 파낸 나무가 피리가 되듯이...

장성희 작가의 글
인간의 생사에 관한 유희적 상상 사후세계에 대한 수많은 신화와 전설, 인류 보편의 상상력의 그물 눈은 아무래도 성기어 모든 이들의 상상을 포획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야기꾼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생사관을 개별적으로 창조해 보고 싶어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자기만의 이해와 납득을 풀어놓고 싶은 것이다. 저승에 대한 새로운 판짜기, 신화 창조자로서의 욕망... 그것도 연극이 가진 유희적 상상력으로 비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으로 꾸며보는 일은 신나는 일임에 틀림없다. 나는 끄달림과 무명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로서 인간을 설명하는 불교적인 환생관과 출생 자체가 원죄인 만큼 천국으로의 영원한 입성을 통해 구원가능성을 강조하는 기독교적 생사관 사이에서 오랫동안 서성였다. 그래서 이 삶과 죽음에 관한 두 갈래의 설명을 합쳐볼 생각을 했다. 동서양이 만나는 퓨전적 생사관이랄까? 지옥에 고통 받는 중생이 하나라도 남아있는 한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 세계를 대속하고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하강한 예수의 마음을 함께 상상해본 것이다. 또한 ‘인간은 혐오의 대상인가 연민의 대상인가’ 하는 질문에 한 갈래의 답을 제시하고 싶었다. 나는 아무래도 인간의 악함보다는 고통 자체에 눈길이 가는 편이어, 이번에도 역시 연민 쪽으로 기운 것 같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연극이라는 허운 신발로 삶의 혹한을 건너려는 나자신에 대한, 또는 내 연극동료들을 향한 위안의 서사 또한 담겨있다. 극중 자기 삶의 의무를 다하고 환생의 고리를 끊은 유일한 존재, 어릿광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어쩌면 연극하는 자부심 한켠에 자리잡은 자기연민… 세상에 대한 큰 연민보다 자기자신에 대한 연민에 갇히고 마는 이 그릇으론 또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연극을 보는 분들이, 건너야할 삶의 고해에 앞서 생명 됨의 축복과 긍정을 엿보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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