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미현 '텃밭 킬러'

clint 2025. 9. 26. 06:36

 

 

술을 마시며 전쟁이 일어 날거라고 믿는 진로 (아버지), 

남의 집 텃밭을 기웃거리며 농작물을 몰래 빼오는 골륨 (할머니), 결혼하고 싶지만, 

방을 얻을 돈이 없는 청년 (진로의 큰 아들), 아가씨 (청년의 여자친구)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 수음은 길거리에 놓인 간이 구둣방에 살고 있다. 

이 가족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절로 한숨이 뿜어져 나온다. 

한숨뿐만 아니라 왜 저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지탄과 함께 연민도 갖게 된다. 

남의 집 텃밭에서 따온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팔고, 그 농작물로 이 가족들을

먹여살리는 골륨의 모습은 처량하기 까지 하다. 처량한 인물이 어디 골륨 뿐인가. 

구두를 닦으며 손님들에게 멸시를 받아, 그게 마음에 쌓인 나머지 정신 줄을

놓게 된 진로와 중학교에 들어가려면 남들 다 입는 노스페이스 점퍼가 필요하다고

중얼거리는 수음도 처량하다. 결혼을 하고 싶지만 방을 얻을 돈이 없어

이층침대에서 신접살림을 차리는 청년과 아가씨도 그렇다. 

결국 이 가족은 저마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골륨 입속에 든 금니를 탐한다. 

숟가락과 뜰채를 가지고 이집 저집 텃밭을 기울이며, 평생을 산 골륨의

마지막 재산을 탐내는 것인데, 구둣방에 모여 사는 가족을 보고 있으면,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자고 이 사회 구성원들은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것일까? 

 

 

 

<텃밭킬러>의 배경은 구둣방이다. 구둣방이었지만 지금은 4인 가족의 집으로 용도 변경된 곳이다. 이곳에서 전쟁을 기다리고 있는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 진로, 학교에 다니지 않은 13세의 둘째 아들 수음, 학생들의 담배 심부름을 하고 있는 20대 초반의 첫째 아들 청년, 이 집안의 전 재산인 금니 세 개를 지니고 있는 할머니 골륨이 살고 있다. 구둣방을 집으로 삼아 4인 가족이 살고 있다는 상상력이 기발하다. 구둣방을 선택한 이유를 작가는 공연 프로그램에서 밝히고 있다. “방이 많은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원룸, 반지하, 고시원, 옥탑방, 잠만 자는 캡슐 방 등등. 하지만 돈이 없는 한 가족이 단단하게 모여 살 수 있는 곳. 튼튼하고 강철로 만든 곳을 찾고 싶었다. 감히 세상 사람들이 건드릴 수 없는. 그런 곳이 어디에 있을까? 거리를 지나다가 서울시에서 제공하는 규격화된 간이 구둣방을 스쳤다. 문득 구둣방이 보온 도시락에 든 아주 큰 밥통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저 곳이라면 한 가족을 넣어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구둣방은 보온밥통처럼 따뜻한 곳이 아니라 정반대로 냉장고처럼 냉골이다. 가족 중 유일하게 현실감을 지닌 인물은 골륨이다. 그녀는 숟가락과 뜰채를 연장 삼아 매일 남의 텃밭에서 식량들을 공수해와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반면 남자 셋은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몽상에 빠져 있어나, 현실에 냉소적이다. 그들의 유일한 공통 관심은 골륨의 금니이다. 그들은 골륨의 금니를 갈취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데 있어서는 의기투합한다. 이들은 금니가 더 닳기 전에 빼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냉혹한 태도가 사뭇 섬뜩하다 무엇보다 작품의 제목이 흥미롭다. ‘텃밭킬러가 할머니 골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나머지 세 남자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의적이다. 1차적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동하는 할머니 골륨이 남의 텃밭을 돌아다니며 매일 식량을 훔친다는 의미에서 텃밭킬러이고, 2차적으로는 이 집안의 세 남자를 일컫는데, 왜냐하면 여성의 자궁을 밭으로 비유하는 것으로부터 연상하여, 세 남자가 골륨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이들이 생계를 전적으로 골륨의 노동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 이 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골륨의 금니 세 개를 세 남자들이 갈취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금니를 내놓으라는 세 남자들의 성화에 골륨의 한탄 속에서 그 의미가 확실해 진다.

나를 너희들 텃밭처럼 평생 동안 그렇게 여기면서. 평생을 뜯어먹고 또 뜯어먹고 살더니만 어떤 날은 상추 뜯듯이 뜯고, 또 어떤 날은 고추 따듯이 하더니. 해마다 열매에 매달린 열매처럼 뚝뚝둑 떼어먹고. 입을 싹 닦더니만. 배고플 때마다 나를, 요긴하게 써 먹더니만.. 너희들은 모두 내 몸을 탕진했어.”

 

 

 

<텃밭킬러>라는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불온함은 연출가 윤한솔에게 매우 익숙한 분위기이다. 윤한솔 연출의 <의붓 기억>(2010)이나 <나는야 섹스 왕>(2011), <두뇌 수술>(2012)을 떠 올려 보면, 제목에서 풍기는 불온한 느낌에 있어서는 윤한솔 연출이 단연 앞선다. 이처럼 윤한솔 연출과 윤미현 작가는 불온함에서 의기투합한다. 이들의 작품들이 불온하다 함은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을 것을 보게 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게 하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듣게 하여 우리 자신의 모습을 수치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텃밭킬러>는 경제 불황과 청년 실업, 파행적인 교육 현장을 풍자하며 무기력하고 기생적인 세대를 비판한다 윤미현 작가의 신춘문예 당선작 <우리 면회 좀 할까요?>(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 당선, 2012) 역시 불온하다. 골프 특기생을 지망하는 18세 소녀가 인터넷에서 성매매를 하고자 굴뚝을 만나 팬션에 가서 벌이는 상황이 매우 불온하다. 이 둘은 실제로 아무런 성행위도 하지 않고 옆방에 투숙한 가난한 남녀의 대화를 엿듣고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하는데, 이들의 대화 속에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와 사회적 위선, 서민들의 무기력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뒤튼다. 불온하다는 점에서 윤미현 작가와 윤한솔 연출이 같은 부류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 면회 좀 할까요?> <텃밭킬러>를 통해 드러난 윤미현 작가의 또 다른 특성은 전통적인 남녀 역할의 전복에 있다. 일반적으로 인터넷 성매매에서 돈을 주고, 성을 사는 사람이 성인 남자라고 생각되지만, <우리 면회 좀 할까요?>에서는 부유한 여고생이 성인 남자의 성을 사는 상황이다. <텃밭킬러>에서도 동네 텃밭에서 먹을거리를 실어 나르는 골륨을 비롯하여 청년과 애인 사이인 아가씨는 무기력한 세 남자들보다 현실적이고, 적극적이고, 자립적이다. 청년이 아가씨와의 성관계를 원하면서도 구둣방이 좁다는 이유로 자신의 욕망을 지연시키지만, 아가씨는 자신의 집에서 이층 침대를 끌고 나와 구둣방 옆에 살림을 차림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실현시킨다. 치킨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아가씨는 학생들의 담배 심부름을 하는 청년보다 더 안정적인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설령 치킨 가게의 영업이 시원치 않을 때조차 그녀는 일당 대신 치킨을 받아 올 수 있다. 골륨에게 텃밭 이용 비법을 배우고자 하는 그녀의 의욕에서도 적극성과 자립심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윤미현 작가는 여성 역할의 전복에 있어서 더 강한 개성을 띤다.

 

 

 

<텃밭킬러>에서 이처럼 볼온한 두 창작자가 만났다는 점에서는 기대를 모았지만 윤미현 작가가 자신의 개성을 충분히 발휘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윤한솔 연출의 무게에 눌리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된다. 희곡과 공연 무대를 비교해 보았을 때 윤한솔 연출의 터치로 희곡의 내용이 변화된 지점이 더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희곡과 공연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마지막 장면이다. 희곡에서는 세 남자들에 의해 뽑혀진 금니 세 개를 골륨이 꿀꺽 삼키며 금니는 자신의 마지노선이라고 말하고 서럽게 웃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공연에서는 전혀 다른 마무리였다. 사실, 세 남자들에 의해 금니가 뽑히는 장면이 명확하게 보여 지지 않았을 뿐더러 골륨 혼자 무대 중앙에 남아 자루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가수 남진의 님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격렬하게 춤을 추다 노래가 끝난 후 자루를 벗으며 지치고 상기된 얼굴로 퇴장하며 마무리했다. 당혹스러운 것은 골륨의 퇴장 이후에도 암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기다리던 커튼콜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관객은 한참을 머뭇거리며 기다리다가 자리에서 어색하게 일어서야 했다. 이러한 결말은 윤한솔 연출이 아니면 의도할 수 없는 상황이다. 관객을 향한 일종의 도발이다. 노래하고 춤추는 골륨은 등이 굽은 이전의 모습이 아닐뿐더러 자루를 벗고 무대를 걸어 나가는 배우는 이미 골륨이 아닌 젊은 여성의 모습이었다. ‘님과 함께를 부르며 춤출 때부터 이미 골륨은 사라졌다. 그러나 이 여성의 존재가 무엇을 의도하고 만들어진 것인지 관객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무대에서 극 중의 골륨을 지우고 전혀 다른 인물을 내세워 마무리하는 과정이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되새겨보면 골륨은 처음부터 할머니 분장은 아니었다. 등은 굽어 있었지만 머리가 하얗거나 할머니 의상을 입고 있지 않았다. 더 나아가 진로와 청년 수음이의 나이 차이도 뚜렷하게 보여주지 않았다. 극 속의 상황만으로 가족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한 연출은 분명히 희곡의 범위를 뛰어 넘는 실험이었다 또 다른 변화로는 희곡에서 청년과 아가씨가 이층 침대 위에서 나머지 가족과 대화하는 장면을 공연에서는 청년과 아가씨가 이층 침대에서 성관계를 맺으며 나머지 가족과 대화하는 기괴한 장면으로 연출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은 희곡에서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매우 도발적인 선택이었다. 이러한 도발이 이 작품에 꼭 필요했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이지만, 아가씨가 이층 침대를 끌고 구둣방 옆으로 찾아와 살림집을 차릴 정도의 성격이라면 연출가가 희곡에 내재된 도발의 가능성을 더 발전시킨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진로가 집 나간 아내를 회상할 때, 희곡에서는 진로가 여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하는데, 무대에서는 앞선 장면에서 구두 찾으러 다니는 여자가 등장해 푹신한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눈을 감고 있다가 진로가 여자 목소리를 흉내내는 부분에서 아내의 대사를 대신 말해 준다. 희곡에 없던 사소한 변화라고 볼 수 있지만, 정체 모를 여자의 맥락 없는 등장이라는 점과 아내의 목소리를 매우 강한 어조로 단조롭게 말하는 점에서 진로의 회상 장면을 매우 강렬하게 만드는 효과를 냈다. 그러나 <텃밭킬러>에서 집나간 아내의 존재가 그처럼 강렬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 장면에 구두 찾으러 다니는 여자의 존재는 설득력이 약했다.

이상의 세 장면은 희곡과 공연에서 달라지는 부분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텃밭킬러>를 떠 올릴 때 이 세 장면이 유독 강하게 인상에 남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과에 대해 작가와 연출가의 비중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봄 작가, 겨울 무대>의 공연으로 성공한 것인가, 착오인 것인가? 신인 작가의 개성을 압도하는 연출가의 개성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이에 대한 답을 성급히 찾지는 않겠다. 작가의 후속 작품들이 다양한 연출들과 만나 여러 차례의 공연 성과를 보고서야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윤미현 작가의 <텃밭킬러>는 윤한솔 연출과의 불온(!)한 담합으로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것이 작가에게 득인지 실인지는 아직 말할 수 없지만

 

윤미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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