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최인석 '어떤 사람도 사라지지 않는다'

clint 2025. 8. 22. 07:46

 

 

 

소도시 인근 다리공사 노무자로 일하던 강춘, 두섭, 성환은 실장의 횡포에 의해

해고 당하고 또다시 다른 일터로 갈 준비를 한다.

한편 공사장 인부를 상대로 한 간이주점 작부 정희는 빛바랜 늙은 모습으로

삶의 의미를 잃고 주인 성자에게 착취를 당한다.

양순은 누구의 씨인지 모르는 아이를 잉태하고 주위사람들의 낙태수술을 거절한 채

도망가려 하지만 공사장 인부 두섭과의 사랑때문에 망설인다.
필름공장에서 흘러오는 폐수 때문에 강은 썩고 그 공장에서 일하던 병노는

차라리 공사장 노무자가 되고자 한다.

모두가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지친 모습에서 헤매이지만 양순은 마지막 꿈을

뱃속의 아이에게 걸고, 두섭은 양순에게 같이 떠날 것을 권한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성환은 술집여자 출신인 어미를 찾으러 떠나려 한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한 팔을 잃은 일우는, 썩은 강을 찾아 몸을 내던지려하는데

삶을 포기한 정희가 강에 투신을 한다.

 

 

 

작가의 글 - 최인석

<어떤 사람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근처에 공사장과 공장이 있는 촌락의 한 술집을 무대로 한 장막극이다. 공사장의 인부들과 공장의 공원(工員), 서울에서 팔을 하나 잃은 퇴역 공원, 그리고 떠돌이와 술집 작부들이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회의 밑바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대개의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이들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인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리의 사람들이 신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젼, 책 등을 통해 사회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취하는데, 이들은 신문에도, 라디오에도, 텔레비젼이나 책 등에도 결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들'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바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들'인 그들이 곧 한국 사회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은 기이한 모순이 아닌가? 한국 사회의 저변을 점하고 있는 이들이 곧 그들인데, 우리들은 그들에 대해 거의 무지하다. 그들이 소외된 사람들이냐, 아니냐, 그들의 가난과 무지가 그들 자신의 책임이냐, 아니면 사회의 책임이냐라는 문제를 떠나서 이들의 삶과 죽음, 소망과 좌절, 기쁨과 슬픔, 번민, 그리고 고통에 대해 안다는 것은 곧 이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재를 똑바로 알고 또한 미래를 예측한다는 의미에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모습,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연극은 내 얘기,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내가 술집 작부가 아니고, 공장의 공원이 아니고, 건설현장의 일일노동자가 아니어도, 지금의 우리의 현실은 다수의 것이 올바르게 행해지지 못하고 있으며, 일하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사회도 결코 아닌 것 같고, 더욱이 그런 자본주의의 모순을 참거나 외면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그런 삶이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현재를 살고 있는 나또한 그들과 같은 삶인 것이다. 연극은 숙제만 내줬다. 양순이 뱃속에 있는 생명에 대해서 정희가 택한 죽음에 대해서, 서울로 떠난 공사장 인부들에 대해서 등등등.... 사람들은 쉽게 쉽게 아주 쉬운일만 하려 한다. 그러다 벽에 닿으면 얕은 벽이어도 그것마저도 쉽게 포기해 버린다. 넘지 못할 벽은 없다. 그들의 지겨운 삶이 양순이의 뱃속에 있는 생명처럼, 그 생명의 모성애처럼 희망이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결코 어떤 사람도 그냥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무대 좌측 전면에 한 술집여인이 헛구역질을 한다. 등을 두들겨 주는 동료 술집작부, 뱃속의 아이가 누구의 씨인 줄을 그녀 역시 알 길이 없다. 그저 먹고 살아가기 위해 아니 돈 좀 벌어 잘 살아보려는 일념, 잠시 이런 술집에 머무르면 되겠지 하다 이 사내, 저 사내를 손님을 맞아 들이고... 결국 이런 몹쓸 꼴이 되어버렸으니 ...
극단 거울의 <어떤 사람도 사라지지 않는다>(최인석 작, 송연근 연출) 공연무대의 색조는 어둡기 이를 데 없다. 무대 앞은 필름공장에서 흘러나온 폐수, 그 폐수로 인해 썩어가는 물, 갖은 악취가 풍겨나오는 강, 바로 그 강이 흐른다. 무대 우측(무대상수)은 어느 간이 주점이다. 삶에 실패한 사람들이 여기로 흘러 들어 그들의 아픔과 절망을 노래한다. 삶의 한계선 밖으로 내팽개쳐져 절망한 사람들, 소외의 극단에 서서 어찌할 바 모르는 사람들, 이런 모티브를 살려내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연출 설계가 이루어졌을까 ? 술집작부 정희와 양순, 빚을 갚지못한 양순의 뱃속에 누구의 씨인줄도 모르는 아이가 꿈틀대고 있다. 빚을 갚으라는 포주(이정미 분)의 성화는 극에 달하고 ... 결국 도망을 쳐 보지만 다시 끌려오는 양순 ... 무대 우측에 주막집 간이 의자, 허름하고 오래된 동그란 탁자 등이 놓여있고..., 서로 마주 보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 어떤 노동자는 피댓줄에 팔이 감겨 그만 팔병신이 되어 버렸으니 ... 또 어떤 노동자, 집나간 아내를 찾을 길 없어 홧술을 마셔되고 ...
이런 절망적 사회 상황, 비정상적 사회 상황, 이를 다양한 각도로 조망하기 위해 꾸며질 수 있는 무대 그림은 어떠한가 ?
술집작부들, 얼굴은 곱상하지만 거기에 그 어떤 아름다움도 근엄함도 찾아볼 수 없다. 삶에 찌들려 있고 그 어떤 비젼이나 희망을 그들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다. 술취한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배우들은 동그란 테이블 주위를 비틀거리며 걸어가며 눈의 촛점은 흐려있다. 술손님들이 뭐라하면 작부 역의 배우들은 술취한 상황이기에 정상인의 반응연기를 하지 않는다. 술쟁반을 들고가는 폼, 그 움직임선이 불안하고 비틀거리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작부 역의 여배우들은 절망한 남자들과는 다른 몸동작을 만들어내고 있다. 최소한 여성적인 다소곳함이 스며있다. 술취한 남자들의 씨부렁거리는 소리를 억지로 들어야 하는 상황, 동시에 앞길이 막막하여 체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를 위해 담배를 피우게 하는 그림, 무대 객석을 바라보며 이를 냉소하는 듯한 얼굴표정을 만들어 내는 무대 그림, 이를 유도하는 연출 설계가 힘을 발휘하는 대목이다. 임신한 술집작부 양순(조미숙 분), 헛구역질 하는 상황, 등을 두들겨주는 동료 작부 정희(권은경 분), 뱃속의 씨가 누구의 씨인줄 모르는 절망적 상황, 도덕성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그 어떤 해결책도 없는 절망적 상황, 술집 주인(포주)으로 부터 빚독촉의 성화는 더해만 가고 ... 그 유일한 비방은 야밤도주가 아닌가 ...헛구역질, 이를 억제하지 못해 아파하는 상황, 일그러진 얼굴표정, 뒤이어 축복받지 못하는 임신, 아비없는 뱃속아이, 공장의 폐수가 흐르는 강을 향해 구역질은 다시 계속되고 ...

 

 

 

젊은 노동자 두섭은 임신한 양순을 데리고 그들만의 새로운 이상향을 향해 떠난다. 누구의 씨인줄 모르는 뱃속의 아이, 그는 기꺼이 그 아이의 아빠가 될 것을 다짐하며 둑길을 따라 멀리 떠나간다. 전체적으로 감상층의 가슴에 충격과 전율을 주면서 동시에 인간이란 그래도 구원을 꿈꿀 수 있구나 하는 희망섞인 결말 ..., 그러나 극작 면에서 감정이입, 아픔, 연민, 갈등의 총체성을 끝까지 한 곳으로 강렬하게 몰고가기 위한 전략, 즉 갈등 증폭을 향한 탄탄한 구성전략이 확실치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인간적 휴머니티를 발휘하기 시작하는 두섭의 등장, 그가 서서히 무대 전면에 나타나고 그의 존재를 부상시키기 위해 배우의 위치는 자주 무대 전면, 중앙에 위치한다. 다른 이들이 앉아 있을 때 그가 서서 움직이는 분량은 많아진다. 다른 이들의 시선, 그 촛점이 흐릿해지고 애매해질 때 그의 시선 만은 강렬한 에너지를 발한다. 술집 포주의 반인간적 처사에 대한 분노가 솟구칠 때 그의 언어나 행동은 빨라지고 급박해진다. 술집여인 양순에 대한 연민, 동정, 뜨거움, 사랑, 포용, 이런 모티브가 살아나기 위해 그의 대사, 시선, 움직임의 속도는 차분해지고 안정되어간다. 물론 이는 치밀한 연출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대 우측 삼분의 이를 차지한 절망의 술집 공간, 탈출과 희망을 상징하는 무대 좌측 야외 공간, 이는 섬세한 황금분할법 구도로 나뉘어져 아름답고 정교한 무대 미술의 묘미를 입증시킨다. 전체적으로 속도, 크기의 측면에서 완급의 조화를 이룬 배우술, 대조의 색채 미학을 상기시킨 의상, 소리의 빛깔, 언어 속도의 완급, 달과 검은 강의 대조 묘미, 일사불란한 통일된 시선처리 전략과 촛점 상실을 의도적으로 처리한 시선 전략... 이런 각 처방들이 총체적으로 앙상블을 이룸으로써 절망의 변주곡, 절망의 상황이 무리없이 살아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절망과 황폐함의 연속임에도 실날 같은 희망의 아리아를 꿈꿀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이 공연은 상황극적 성향과 리얼리즘극적 성향을 골고루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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