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안수길 원작 신명순 각색 '북간도'

clint 2025. 2. 28. 14:20

 

 

 

1부 
두만강 건너 간도지방의 비옥한 땅이 우리의 영토임을 밝힌 백두산정계비가 발견된 후,

함경도 주민들은 떼지어 간도로 건너가 정착한다. 한편 청국은 이민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자,

한말 정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간도이민들에게, 청국정부는 흑복에 변별을 하고

귀화입적하지 않으면 토지문권을 내주지 않겠다고 위협한다.

이에 이한복 영감은 완강히 거부하지만, 최칠성은 타협할 것을 내세워 의견이 대립된다.

이때 창윤이 동개네 집에서 감자를 훔쳐먹다 들켜 머리를 되놈꼴로 깍여 돌아온다.

흥분한 마을사람들은 동개네를 때려부수러가고, 이한복 영감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창윤의 머리를 싹뚝 자르고는 울분으로 쓰러진다. 
비봉촌 거리 10년 후, 동네 잔칫날이다. 성인이 된 창윤은 복동예와 결혼할 것을 꿈꾸지만 

부모의 강권으로 노서방에게 시집가게 된 복동예는 창윤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편 창윤을 혼내주려고 노고 있던 노서방과 최삼봉은 오히려 창윤에게 매를 맞는다.. 
동개네의 잔치를 알리는 풍악소리에 장손과 세룡은 울화를 터뜨린다. 

이때 비각이 타오른다. 창윤이 불 지른 것이다. 청국관리들이 창윤이 도망간 걸 알고 

대신 장손을 체포해간다. 창윤은 그후 용정 사포대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는다. 

한편 러시아의 세력이 밀려들어 청국인들이 쫓겨나게 되자 현도와 세룡은 비봉촌에도 

사포대를 조직하여 되놈들을 막아낼 것을 창윤에게 의논한다. 다시금 의기에 넘치는 창윤은 

비봉촌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비봉촌 사포대가 발족하는 날이다. 

마을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포대 대원들의 훈련이 무르익는 때 청국군대가 사포대를 

쳐부수기 위해 공격해온다. 사포대대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터로 향한다.
부상을 입고 잡혀온 창윤은 감옥에서 청국사람 왕수산으로부터 국제정세를 듣고 청국과 

조선이 형제 처럼 손을잡고 함께 왜놈들을 물리쳐야 하는 이유를 깨닫는다.
창덕은 왜놈 영사관에게 논문서를 잡히고 장사밑천을 얻으려다 창윤과 크게 대립되자 

창윤에게 폭언을 퍼붓고 뛰쳐나간다. 결국 왜놈의 등살에 못이겨 다시 떠나는 이주민들. 

뒷방예는 어디간들 칡넝쿨 처럼 질기게만 살라고하며 눈물을 흘린다. 

눈보라에 떠나는 이주민들의 행렬.

 


2부
10년 후. 창윤과 현도는 한가롭게 앉아 지난 세월을 회상한다.

이때 교사 주인태가 찾아와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을 알려주며 창윤은 긴장한다.

정수는 자신이 만세대열에 참여치 못한데 대해 안타깝다. 

그러나 영애는 이번 일의 자초지종과 선교사의 뜻을 밝히며 정수에게 용기를 주지만 

어딘지 불안해하는 정수. 이때 만세소리에 이어 총성이 들리자 놀라 뛰쳐나가는 정수.
만세군중과 이를 무차별 학살하는 청국군대 경찰들의 아수라장...
경애는 만세운동때 청국의 돌변한 태도에 의심을 품지만 실은 일본의 

조작극이었음을 알고 다시 한번 증오에 몸을 떤다. 

드디어 정수는 동지들과 일본영사관에 불을 질러 만세운동때 당한 보복을 하고는 

독립군을 찾아 떠나간다. 돌아오지 않는 정수의 무사함을 비는 창윤. 

그러나 현도는 진작 정수에게 장사를 배우게 하지 않았음을 나무란다. 

이때 도둑질하다가 잡혀온 복동예. 아편중독자가 되었다.

지난 세월의 무상함에 넋을 잃은 창윤. 그러나 복동예는 창윤에게 돈을 구걸한다.
청산리 싸움을 끝낸 김좌진장군 승리했지만 부상당한 많은 병사의 신음소리. 

창덕도 용감한 전투를 마치고 죽음직전에 정수를 만난다. 창덕은 형님께 저지른

자신의 잘못을 깊게 속죄한다.
청산리 싸움의 분풀이로 일본은 죄없는 조선사람들에게 잔혹한 학살을 감행한다. 

샛노루바위 사건때, 영애는 아버지를 잃고 슬픔에 빠진다. 영애는 우리민족의 일은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함을 강조하며 선교사님께 구원해줄 것을 기도한다.
10년 후 정수를 기다리는 쌍가매와 영애, 이젠 창윤도 현도도 많이 늙었다. 

드디어 정수가 돌아온다. 그러나 창윤은 독립도 하지 않았는데 돌아온 정수를 

맞아주지 않지만 쌍가매는 다시는 정수를 놓지 않겠다고 한다. 

현도는 정수가 자수하면 다시 살 수 있음을 쌍가매에게 알려준다. 

결국 동지를 배신하고 정수는 자수하나 일본 재판정은 징역 5년을 선고한다. 

5년 후, 정수를 애타게 기다리던 창윤도 이제 임종을 할 순간이다.

쌍가매, 현도, 영애가 안타깝게 지켜본다. 

창윤이 숨을 거두자 돌아온 정수. 쌍가매 통곡한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4代에 걸친 자주적인 삶의 투쟁은 

이제 정수의 손에 그 임무가 쥐어졌다. 

정수는 다시 시작할 각오를 굳힌다.

 



<북간도>는 무대예술이기에 앞서서 문자로 기록된 장편소설이다. 그것이 무대예술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옮겨짐으로써 이 작품은 새로운 작가에 의한 새로운 창작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디까지나 원작으로서의 소설을 기점으로 하고 이것을 새로운 형식속에 굴절시켜 나간 것이라고 한다면 먼저 그 원작을 살펴나간다는 것은 그 연극의 새로운 예술적 형상화 과정과 그 창조적 가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당연히 따라야 할 순서가 될 것이다. 
장편소설 <북간도>는 1977년 4월에 7旬의 고령을 마지하며 작고한 안수길의 대표작이다. 이것이 그의 대표작인 까닭은 이 작가가 가장 오랜 시일에 걸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며 8.15 해방 때까지 그가 직간접으로 겪었던 모든 역사적 체험과 함께 그가 버리고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까지도 집약시켜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속에 상징적으로 쏟아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무대가 되고 있는 間島(사잇섬)와 함경도지방 및 만주지방은 모두 작자가 어린 시절과 초기의 작가시절을 보냈던 곳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그만큼 작자의 직접적 체험이 리얼리티의 바탕이 되고 그 증언이 작품 전체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북간도>는 1959년에 처음으로 「사상계」에 제1부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60년대 초에 들어서서 다시 제2부가 착수되고 1967년에 제5부까지의 전작이 완성되었다. 8년간에 걸쳐서 비로소 완성된 이 작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1870년부터 1945년까지 75년간의 우리 민족의 북간도 이민史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고 노래하던 우리 땅을 두고 백성들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험난한 고장을 찾아갔던 것일까? 작자는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남녀 노소가 산으로 들로 나무뿌리나 나물을 캐러다녔다. 먹을 수 있는 거면 땅 속에 있건 땅위의 거건 움트는 싹이건 줄거리건 상관할 바 아니었다. 칡뿌리가 캐어지고 소나무가 껍질이 벗겨졌다. 그래도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이것이 맨처음 이민의 동기다. 함경도 오지(奧地)에 흉년이 들고 아사자가 속출하게 될 때 이 작품의 제1대 주인공 이한복은 야음을 틈타서 사잇섬 농사를 지러다닌다. 사잇섬 북쪽 두만강 기슭의 청국땅까지 월경하여 버려진 비옥한 땅에 감자를 심으며 불법농사를 짓는 것이다. 이것이 불법으로서 엄격히 금지된 것은 종주국인 청국과의 계약 때문이지만 정부는 결국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서 이를 묵인하게 되고 이민이 확대된다. 결국 이것은 청국과의 마찰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요 그후 일제의 대륙침략으로 더욱 복잡한 갈등을 야기 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소설의 사건전개는 이같은 국제적 역학관계를 모티브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곧 조선족 이민의 연대기적 구성형식을 지닌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파란곡절의 역사적 흐름을 통해서 작자가 찾아나가려고 한 테마는 우리가 그 속에서 어떻게 민족적 주체성을 위협받았으며 그 주체성을 얼마큼 좌절했고 또 얼마큼 유지되어 8.15해방으로 이어졌느냐 하는 점이다. 단지 작자는 이처럼 외국의 열강들 틈에서 우리의 민족적 주체성이 어떻게 부각되고 확산되고 무서운 시련을 겪었느냐 하는데 관심을 집약시키면서도 결코 딴 작가들의 시대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장된 인간드라마나 애국운동의 과장적인 사건은 보여주지 않고 있다. 어디까지나 냉철하고 엄정한 증인의 입장에서 사실을 증언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초인적인 영웅으로 미화된 주인공 따위는 등장하지 않으며 그보다도 모든 인물에 있어서 그들의 소박한 인간성, 순수한 용기, 또는 그 인간적 약점까지 숨김 없이 드러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더욱 친근감을 지니고 작품세계에 동화시켜나가는 매력을 지니게 한다. 

 

 


이같은 수법으로 작자가 맨 먼저 등장시킨 것이 제1대 주인공 이한복과 기타 비봉촌의 인물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청국의 위협아래서 제1차적으로 민족적 주체성의 시련을 받게 된다. 즉 중국인 옷을 입고 변발하고 그들에게 입적귀화 하느냐 아니면 농사짓던 땅을 포기하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래서 북간도 비봉촌의 조선인 중 이한복은 상투를 끝까지 고수하며 그들에게 항거하고 장치덕 등 일부 촌민은 제 머리를 스스로 깎아버려 절충식으로 현실에 적응해버린다. 그렇지만 이한복의 항거는 순탄하지 않다. 어느 날 손자 창윤이 청국인한테 강제로 끌려가서 변발한 모습으로 귀가하게 되며 이한복은 그것을 가위로 짜르다가 졸도하여 운명해버리고 만다. 그후 농부 김서방이 억울하게 청국인들에게 매를 맞고 다시 청국관헌에 인계된 후 시체로 돌아오는 사건, 학교에서 돌아오던 어린 학생 최창락이 중국인 경찰의 이유 없는 발포로 숨지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조선인 농민 김춘택이 역시 억울하게 일본 경찰에 의하여 마을에서 총살되는 사건이 있다. 작가는 이런 사건들을 계기로 해서 북간도 우리 조선인들이 민족적 주체의식을 서서히 부각해 나가는 과정을 더듬고 있지만 그것을 조직적으로 집약된 항쟁의 형태로는 쉽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왜냐면 민족적 주체의식 못지 않게 생존을 위한 논리가 절실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강한 저항의식의 표현이든 현실에 의한 순응으로서 귀화인이 되는 것이든 또는 청국이나 일제의 앞잡이로 변절하는 것이든 그 어느 것도 생존권의 보장이 되지는 않는다.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이민 제4세대에 해당되는 이한복의 증손 정수까지도 독립군을 이탈하여 일제의 거짓 약속에 속아 자수했다가 복역 후 다시 독립군에 가담한다. 그리고 독립군의 기관총 사수로서 용맹을 떨치던 주인공까지도 이처럼 쉽게 자수하는 사건 등으로 말미암아 이 작품은 투철한 민족적 주체의식을 지닌 어떤 이상적인 인간형을 제시해주지는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 작품의 단점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또 이 작품의 장점일 수도 있다. 왜냐면 그것이야 말로 보다 더 정직하게 역사를 증언하고 우리 민족적 기질의 어떤 실체의 일부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같은 저항과 좌절과 방황의 역사를 통해서 작자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추구해나간 테마는 궁국적으로 민족적 주체의식에 집약된다. 작자가 북간도라는 지리적 배경을 선택한 것은 자신의 직접적 체험과도 관련이 있지만 그보다 필연적 동기로서의 그것은 북간도가 강대국의 횡포와 세력다툼 사이에 낀 약소민족의 처절한 싸움의 상징적인 축도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우리의 영토라는 증거에 입각해서 빼앗긴 조국을 더욱 실감있게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자는 이 시련의 현장을 통해서 민족적 주체의식이 날이 갈수록 고조되는 과정과 함께 그 절실성을 입증하며 한편으로는 그토록 민족적 지도자도 없이 이국땅에 내버려진 그들의 고난을 통해서 그 역사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준엄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작품을 손질하며 - 신명순 각색자
10年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데 <북간도>가 초연된 지 햇수로 꼭 13年이 흐른 셈이다. 그동안 세상이 몇 번씩이나 제멋대로 곤두박질을 치는 바람에 나로서는 그 13年이 꼭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쯤으로 느껴질 지경이다. 그래서 이번 <북간도>다시 무대에 올려보면 어떻겠느냐는 전갈을 받았을 때 솔직히 말해서 난 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原작가인 안수길 선생님이 他界하신지도 이미 오래전 일이고 연극에 참가했던 몇 분이 세상을 떠났기에 초연 때의 대본을 훑어보면서 나는 나름대로의 감상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런 느낌은 <북간도>의 時代的 背景인 20세기 초엽보다 우리들이 겪어낸 6, 70년代가 훨씬 더 것잡을 수 없는 격동기였기 때문은 아닐까?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여러가지가 억세게도 바뀌었는데 <북간도>라 해서 예외일 수는 없는 노릇, 아무튼 이번에 다시 作品을 손질하면서 나는 수술실에 들어간 外科의사의 각오로 <북간도>를 펴들었는데 나는 채 메스도 들기 전에 완강한 저항이 부딪혔다. <북간도>가 그리고 안수길 선생님의 탄탄한 작가 의식이 너무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거기 살아 있었다. <북간도>를 살다간 사람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는 망설였다. 어차피 <북간도>사람들은 <북간도>사람대로 살다가 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았고 서툰 재기(才氣)는 오히려 어려운 시대를 끈질기게 살다 가신 그분들에게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60年代의 허름한 옷을 걸친 <북간도>를 그대로 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과부터 말하면 나는 이번 作業에서 60年代의 의상에 지나치게 연연하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80년代식 메스를 함부로 휘두르지도 않았다는 얘기다. 소설 <북간도>에는 많은 영웅, 의열사들이 등장한다. 이번 작업에서 나는 이런 분들의 등장을 가능한 한 억제했다. 초연 때 상당한 비중을 두었던 해설 役도 없었다. 대신 되도록이면 이한복의 4代에 걸친 삶. 그 자체를 좀 더 밀도있게 그리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들은 억세게 저항했지만 아무도 그들 일가를 영웅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저버림 받고 헐벗은 땅 <북간도>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순수한 조선인으로 살다가 간 사람들이다. 그들이야 말로 시끄러운 小數. 소문난 일부보다는 말 없는 多數. 그래서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다가 사라져간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떠난 우리들 전부의 얼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고나면 온통 바뀐 것 투성이인 요즈음 - 그리고 그것을 발전이라고 강변하기 일수인 요즈음- 초연 무대에 출연해 주셨던 백성희 선배님, 정애란 선배님, 그리고 장민호 선배님이 변함 없는 모습으로 연습장을 지켜주신 일은 나에게 시사해준 바가 많았다. 세분 선배님과 모자라는 작품에 새옷을 입히려 무던하 애쓰신 林英雄 연출님, 그리고 단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1968년에 국립극단은 신극 60주년과 제2회 3.1 연극상 수상기념으로 안수길의 『북간도』를 각색한〈북간도〉(신명순 각색, 이해랑 연출)를 공연했다. 그후 13년이 지나 신명순 재각색하고 임영웅연출로 다시 국립극단에서 공연한 것이다. 신명순은 “방대한 원작이 주는 외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해설자를 등장”시켰다.그러나 1968초연 때보다는 대폭 줄였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해설자의 기본적인 역할은 시공간의 변화를 알려주거나 극중 사건의 추이를 요약해 설명하는 것이다. 연극에서 사포대 활동- 3.13운동- 청산리에서 독립군 활동- 일본군의 조선인 학살 등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장면을 영화처럼 실감나게 보여주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신명순은 이런 장면을 ‘보여주기’가 아닌 간단한 무대 및 등장인물과 해설의 ‘말하기’를 통해 시공간 이동하고 극적사건을 처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