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흥록의 어미는 태몽을 꾼다.
하늘의 옥황상제가 아들이 죄를 범했는데 하늘 광대가 그 죄상을 고발한다.
그러나 옥황상제는 고발한 광대야말로 죄인이라 보고 그에게 벌을 내린다.
그래서 그의 혼백을 지상의 한 여자의 태속에 넣는데, 바로 흥록의 어미다
그리하여 태어난게 흥록인데, 나이 스물에 그곳에 명창으로 소문이 난다
헌데 명창으로 소문이 난 그를 최초로 능멸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아닌
기생 맹렬이다. 흥록은 목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득음을 하리라고
굳은 결심을 하고, 심산유곡으로 들어간다
소리공부하는 흥록 앞에 나타난 한떼의 도둑들, 흥록은 그들에게 소리를 들려
주는데 그들은 그 소리를 배척한다. 그 소리가 양반네나 들을 소리란 것이다.
그들이 떠난 뒤에 흥록은 남모를 갈등을 느낀다. 백성들의 소리를 하면
양반들이 고개를 돌리고 양반들 들고 소리를 하면 백성들이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갈 길은 어디인가? 그날 밤 흥록은 꿈을 꾼다. 온세상이
차별도, 싸움도, 억압도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는 기쁨에 넘쳐 소
리를 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 소리를 즐긴다
산에서 내려간 흥록은 동생 광록와 관아의 행사에서 소리를 한다. 모두 반기나
그 소리에 기생 맹렬이 반하고, 흥록을 유혹한다. 그리고 둘은 살림을 차린다.
흥록의 명성이 더욱 더 높아져서, 급기야 서울 의정부의 좌찬성 김병기가 흥록
일가를 서울로 부르고, 서울로 올라와 정3품 통정대부의 비술까지 재수받는다.
서울에 자리 잡은 흥록의 집에 도둑의 두령이 나타난다. 그는 흥록이 소리
광대가 아니라 기생이라 질타한다. 양반들의 돈에 소리와 목을 팔았다는 것.
흥록은 깨달은 바 있어 고통스러워 한다
흥록은 만백성이 다 같이 듣고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소리를 만들기 위하여
소리 하는 곳에 가지 않고 소리 궁리만 한다. 맹렬은 흥록에게 돈을 벌어오라
조른다. 그때 김병기의 하인이 와서 김대감의 생신이니 와서 소리를 해달라고
한다. 강권에 못 이겨 김대감 집에 가서 목이 막혔다는 핑계로 소리하지 않고
나오는데 논에서 농사꾼들이 일하는 것을 보자, 그들 앞에서 흥에 겨워
춘향가를 부른다. 집으로 돌아온 그를 기다리는 맹렬이가 떠나간 빈 방.
게다가 포졸들이 김대감 댁에서는 소리를 않고 농사꾼앞에서는 소리 했다는
것을 안 김대감이 분노한 것이다. 흥록은 감방에 갇힌다. 그날 밤 꿈을 꾼다
온세상이 차별도, 싸움도, 억압도 없이 살아가는 꿈을.
축복 또는 저주 - 작가 최인석
전통문화란 우리 겨레가 5천년동안 쌓아오면서, 그 생활과 역사와 더불어 발전시켜온 가지가지의 습관이나 풍속, 의식주, 학문, 예술, 종교 등의 총체이다. 그 가운데 바람직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으며 오늘날의 생활과 무리없이 조화를 이룰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으며, 오늘의 관점에서 가치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다. 어느 것이 가치가 있고 없느냐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도 있겠으나 전통문화 전반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전통문화의 모든 것이 오직 전통문화란 이름 하나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고, 권위를 지녀야한다는 생각은 명백한 오류이다. 전통문화 역시 객관적으로 파악되고 연구 계승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합리적 비판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창극은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려는 시도이다. 전통문화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이 필요하듯이, 지금까지의 창극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 역시 필요하며, 창극의 발전을 위해선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다. 판소리는 우리 전통유산 가운데서도 그 예술적 무게에 있어서 여타의 다른 유산에 비견될 만큼 찬란한 전통문화의 보고이다. 창극은 바로 그 찬란한 보고를 토대로 탄생되어 오늘날까지 성장해왔다. 창극 나름의 전통도 착실히 축적되어 왔다. 그러나, 그 전통이 새로운 발전과 창조를 위한 밑거름이 되지 않고 오히려 사슬이 되고 굴레가 된다면, 그 찬란한 판소리의 전통과 지금까지의 창극의 전통은 발전과 창조를 위한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고 말 것이 아닌가? 창극 나름의 품위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 예술적 설득력과 감동이상의 품위는 없다. 예술적 설득력도 감동도 없는 것이 품위라는 이름으로 그 유효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품위가 아니라 권위이며, 그것도 타당성이나 유효성이 의심스러운 권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면 예술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는 - 품위와 마찬가지로 - 예술적 설득력과 감동에 의해서가 아니면 부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나를 이끌어주신 손진책 연출님과 여러 선생님들, 선배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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