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페르는 엄마 오세의 바람과는 달리 허황된 꿈을 꾸며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오세는 페르를 좋아하던 부잣집 딸 잉그리드의 결혼소식을 알려준다.
결혼식에 찾아간 페르는 솔베이지를 만나 한눈에 반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거절당하자 결혼식을 망쳐놓고,
잉그리드를 데리고 산으로 도망친다.
오세와 솔베이지가 폭풍 속을 헤매며 페르를 찾아 나선다.
사랑을 나눈 후 그새 싫증이 난 페르는 잉그리드를 버린다.
산속, 네 여인을 만나고, 남자를 원하는 그녀들과 음탕한 놀이를 즐긴다.
다시 산속을 헤매는 페르, 초록여인과 사랑을 나눈다.
그녀가 트롤 왕의 딸임을 알게 되고 자신이 왕자라고 거짓말을 한다.
트롤 왕은 딸과 결혼하면 왕국을 주겠노라고 말한다.
트롤 왕의 수수께끼를 풀며 시험을 통과하지만
눈을 뽑으려 하자 페르는 도망치고 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보이그와 싸움을 벌이는 페르,
보이그는 '돌아서 가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마을로 돌아온 페르는 다시 산속으로 추방된다.
솔베이지가 그를 찾아오지만. 초록여인이 나타나자
자신의 죄로 고통 받는 페르는 솔베이지를 두고 떠난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는 페르. 그는 이제 모험을 떠난다.
2부
30여 년 후, 사업가로 큰 성공을 거둔 페르는 기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성공담을 떠들어댄다.
욕망의 끝을 달리는 페르는 어느새 예언자가 되며,
매혹적인 아니트라에게 빠져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원숭이 떼를 쫓고 있는 페르, '인간과 습관'에 대한 궤변을 늘어놓는다.
학자의 행세를 하며 이집트를 여행하던 페르는 베그리펜벨트 박사를 만나
그의 인생 수수께끼를 풀어준다.
박사를 따라 카이로 정신병원으로 도착한 페르는 정신병자들로부터
황제로 추앙을 받는다.
다시 10여 년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페르. 그러나 비행기는 추락하고
그 와중에 자신의 시체를 요구하는 낯선 승객을 만난다.
모든 것을 잃은 페르는 어느 장례식을 마주친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이켜본다.
긴 세월 약속을 잊지 않고 자신을 기다려온 솔베이지를 본 페르는
충격에 빠져 그 자리를 도망친다.
황야를 헤매는 페르 앞에 단추공이 나타난다.
그는 명령서를 보여주며 그를 주물국자 속으로 데려가려 한다.
그가 완강하게 거부하자 자기 자신이었던 것을 증명하는 증서나
죄인임을 증명할 참회록을 가져오라고 한다.
중인을 찾아나서는 페르. 거지가 된 트롤 왕을 만나게 되지만
그는 오히려 페르가 트롤 중에 트롤이었다고 말한다.
참회록을 찾으며 목사로 보이는 야윈 사나이를 만나 자신의 죄를
고백해보지만 죄를 인정받지 못한다.
더는 피난처를 찾지 못하는 페르는 마지막으로 솔베이지를 찾아간다.
자기의 죄를 물으며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어달라고 말하다
솔베이지는 평생 기다려온 그를 따뜻하게 안는다.
<페르귄트>는 입센의 첫 망명지였던 이탈리아(쏘렌토)에서 쓰인 두 번째 작품으로 "5막의 극시"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쓰인 첫 번째 작품은 <브란트>(1865)이며 이 두 작품은 원칙적으로 공연을 염두에 두지 않은 레제드라마 (Lesedrama)로 쓰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브란트>로 극작가로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 입센은 바로 다음 해 <페르귄트>를 통해 "혈색 좋은 뺨을 하고 자족에 빠져 있는" 노르웨이인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했다. 그래서 이 작품에 입센 자신의 자전적인 요소들이 많이 담겨있다. 특히 페르의 어머니 오세는 자신의 어머니 마리헨이 모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집안이 파산함으로써 대저택에서 시골의 농가로 이사를 가야했던 사실은 입센의 삶과 작품에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늘 '대단한 집안 출신임을 떠들어대고 온갖 편력을 하게 되는 페르는 이런 입센에게 어떤 의미의 보상인물이기도 하다.
입센이 방대한 스케일의 '시'라고 명명한 <페르귄트>는 5막으로 되어 있으며, 입센이 대가의 솜씨를 보인 '잘 짜인 극'이 아니라 매우 자유로운 구성으로 되어 있다. 극중 장소들도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 2부처럼 다양하며 비현실적인 인물들까지 등장하고, 극중 시간 역시 주인공 페르가 혈색 좋은 20세의 청년에서부터 늙고 지친 몸으로 다시 고향에 돌아오는 때까지 펼쳐진다. <페르귄트>는 여러 사람들에게서 '낭만주의의 옷은 입고 있으나 그 내용은 반낭만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주인공 페르는 그동안 입센이 읽고 경험한 많은 문학작품들과 극작품들에 들어있는 인용문들을 자주 말하지만 그대로의 인용이 아니라 극의 내재적 요소에 맞게 변형되어 있다. 5막에 나오는 양파의 모티프가 전해주듯 알맹이 없는 허풍쟁이, 바람둥이, 몽상가, 위선자인 페르의 편력과 모험을 그린 <페르귄트>는 발표되자 노르웨이인들의 분노를 샀고 많은 논란을 낳았다.
역사적으로 <페르귄트>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첫째는 5막 모두를 주인공의 백일몽으로 보는 것이다. 즉 페르의 소망과 동경, 불안과 공포가 과도하게 노출되어 백일몽으로 나타난다고 보는 해석이다. 이 해석에서는 어머니 오세의 불안한 정서가 아들에게 그대로 전이된다고 본다. 편력을 거치면서도 페르는 인간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해 친구 한 명 없으며 경험의 결과물들도 결국은 놓치고 만다. 페르에겐 세계가 무대이며 그는 그 무대에서 계속 옷을 바꿔 입으며 경험을 하지만 본질을 찾지 못하고 그 자신이 알맹이 없는 양파같은 인물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해석은 개개 인물들이나 5막 전체를 알레고리로 보는 견해이다. 즉 대부분의 인물들이 페르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아가는데 있어서 페르 자신의 알레고리라고 보는 관점이다. 페르는 자기 인식을 할 수 있도록 여러 인물을 만나고 많은 것을 경험하지만 자신의 경험과 실수에서 배우지 못하는 어떤 의미에선 전혀 19세기적 인간이 아니다. 18세기 계몽의 시기를 거친 후 19세기에는 시민의 교양이 화두였지만 말이다.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노르웨이에서 많은 논란이 일었던 것도 여기에 큰 이유가 있다. 페르는 늘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프로이드의 이론을 빌리자면 '수유기'에 머물러 있는 어른 아이. 즉 퇴행적 인간이다. 마지막에 솔베이지에게서 구원을 받을 때에도 페르는 그녀를 어머니라 부른다. 솔베이지도 페르 어머니 오세의 알레고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페르귄트>는 또한 북구의 <파우스트>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주인공들인 파우스트와 페르귄트는 분명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다. 파우스트가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편력했다면 페르귄트의 편력은 양파와 비견되는 알맹이 없는 것이다. 어쨌든 두 인물 모두 구원의 여성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파우스트에겐 그레트헨이. 페르에겐 솔베이지가 그렇다.
1876년 크리스티아니아(현재 오슬로)에서 세계 초연된 <페르귄트>의 음악은 노르웨이의 국민 작곡가 그리그(Edvard Grieg)가 썼는데, 입센은 그에게 작가로서 각막마다 어떤 음악이 들어가야 하는지 자세한 주문을 했다. 애초부터 공연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인지 입센은 공연을 위해서 1막에선 대사를 좀 자르고, 4막은 다 삭제해도 좋지만 페르귄트가 넓은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을 암시하는 음악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5막 역시 축소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고, 연출자의 삭제 필요에도 동의했다. 평론가들은 공연에서 연출자가 내용보다는 스펙터클에 치중할지 모르고, 관객 역시 희곡의 가치보다는 호기심에 이끌릴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지만 이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20세기에 와서 <페르귄트>는 노르웨이 국립극장의 정규 레퍼토리에 들어가 있으나 상당히 많이 삭제된 형태로 공연된다. 공연적 측면에서 볼 때 <페르귄트>는 많은 상징적이고 환상적인 인물들과 그로테스크한 장면들 때문에 연출가는 물론 무대미술가들에게 어려운 도전을 요구하는 작품이고, 또한 타이틀 롤을 맡는 배우에게도 많은 것을 요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천방지축 20세의 젊은이부터 지친 몸으로 자신을 믿고 기다리는 솔베이지에게로 돌아오는 늙은이까지를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구성 연출의 글 - 양정웅
"나는 페르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한다.
게으름, 공상과 모험, 욕망과 이기 그리고 사랑...
페르는 이 시대, 현대를 사는 우리 개인의 초라하고도 위대한 서사시다."
“<페르귄트>는 나의 오랜 로망이었습니다. 오세가 페르귄트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나의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부터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와 함께 페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죠. 그 막연한 만남이 어느 순간 구체적인 삶의 무게로 다가왔고, 페르가 자기자신을 바라보는 여정은 이제 내가 내 자신을 마치 처음 대하는 것 같은 시간으로 열어주었습니다. 페르의 대사처럼 '운명적 지배'로 이어진 거죠. 페르의 무대는 그가 경험하고 사유하는 '영혼의 방'이며, '놀이터'입니다. 거울은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죠. 우리 모두 나 자신을 직접 보지 못합니다. 거울에 비쳐진 내가 정말 '나 자신'일까요? 흙은 자기 본연이며, 어머니이자 고향이자 죽음입니다. 오브제들은 이름을 명명하는 대로 되는 연극적 상상력입니다. 욕조는 목욕을 하는 곳이지만, 누군가 거기에서 먹고 자고 한다면 집이 되죠. 사다리는 우리가 산이라 이름 붙이면 산이 되고, 나무라 하면 그 순간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페르의 음악은 시간입니다. 시간의 조각들을 모았다가 풀었다가 자기 자신을 조망하는, 시간을 열어주는 공간입니다. '죽음'과 '자기 자신' 그리고 '구원', 이 단어들은 종교적입니다. 우리는 이 단어들의 의미를 갈망합니다. 솔직한 자기 자신과 직면하고 인식하는 그 순간 비로소 '자유'와 '구원'을 만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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