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부부가 만나기 전, 두 명의 11살 어린이 브루노와 페르디낭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유는 브루노가 자기 패거리에 페르디낭이
들어오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페르디낭은 브루노의 이빨 2개를 막대기로 부러뜨렸다.
미셸과 베로니카는 자기 아들의 이빨을 부러뜨린 아이의 부모,
알렝과 아네트를 집으로 초대해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의논하려 한다.
아이들의 싸움에 대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또 부모들이 아이들의 파괴적인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지.
처음에는 점잖고 매너 있게 시작한 두 부부의 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바보 같은 설전으로 변질되고
다양한 내용의 유치한 논쟁으로 과격해진다.
부부들은 점점 극단적으로 유치해지고 그 결과 혼란에 빠지는데...
싸우고...그러니까 또 싸우고... 안치운 평론가
제목 <대학살의 신>의 뜻이 쉽게 와 닿지 않는다. 이를 농담으로 풀어 말하자면, 싸움의 우두머리가 누구인가로 읽으니 조금 낫다. '대학살'이라고 하지만, 작품의 시작은 겨우 11살짜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한바탕 붙은 사소한 싸움이다. 이어서 아이들의 두 부모, 그러니까 네 명이 화해, 조정을 위해서 만나지만 싸움은 조금씩 더 커진다. 끼리끼리, 돌아가며 싸우는 꼴이 다. 그래서 싸움은 대학살이 되는 모양이다. 아무튼 시시한 싸움도 싸움인지라, 그 원조는 아이들인 터라, 이들이 싸움의 원조이며, 전통이며, 역사 즉 신(dieu)이다. 아이들의 싸움이 대학살과 같은 큰 싸움으로 확대되고, 어른인 부모가 아니라 자식인 아이들이 그 싸움의 신이라면 이 연극은 역설이다. 신(神) 아이들의 명을 받아, 아니 그 아이들이 자라서 된 부모들이 용병처럼 덩달아 싸우는 가정과 사회의 풍경은 코메디일 수밖에 없다. 대리전을 치르는 이 부모들은 유럽 사회의 부르주와 계급에 속한다. 예의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교육받은 중산층으로서, 삶을 어느 정도 수놓을 수 있는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부모들은 실은 마네킹과 같은 인물들이다. 이들의 모든 총체적 가치들이 잘 길들인 말과 행동에 들어있다. 인물들의 다변증은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기이며, 속내를 드러낼 때는 서서히 슬쩍 돌려막기에 가깝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듯 보이는 언어로 사건을 돌려막아 결국 제 이익을 챙기고, 상대방을 희생자로 만들려는 노력, 그것이 이 작품 속 유럽 중산층 계급의 사회학적 삶의 전형이다. 참고로 야스미나 레자의 어머니는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 아버지는 러시아 유대인 사업가로, 철의 장막이었던 동구권의 해체 이후, 프랑스로 정착했다. 이들의 꿈도 부르주와가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야스미나 레자가 가진 무기는 언어의 상상력뿐이지만, 미약한 자기자신 삶의 근거들을 송두리째 드러낼 만큼 용감하다. 모두가 싸운다. 두 아이가 중립적 장소에서 먼저 싸워 결판이 나자, 피해자의 부부가 가해자의 부부를 집으로 불러들여 리턴 매치를 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엄마와 아들이 두루, 차례로 싸운다. 처음 아이들의 싸움은 주먹을 주고받아 이가 부러지는, 육체가 탄알이 되어 상대방의 몸에 꽂히는 육탄전이었지만, 그 다음 부모들끼리의 싸움은 말들이 육체를 대리해서 겨루는 외교전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부모들이 서로 마주보고 예의의 태도와 겉치레의 언어를 가지고 화해를 모색하지만, 머리는 승리를 위한 전략을 짜내기 바쁘다. 이들의 언어는 가면의 사회학을 낳고 유지하는 무기이다. 인물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계층의 대표이고, 이들 삶의 바탕이 되는 가치들은 무기가 되어 대립한다. 무대공간인 거실에 놓인 예술서적, 튤립 꽃다발이 담긴 화병, 테이블들은 무기를 감추는 은폐의 일상적 기술들이다. 싸움이 벌어지는 우리와 같은 거실은 곧 사각의 링이다. 두 커플이 빠져 나갈 수 없는 링에서 언어로 혈투를 벌이고 있다. 아이들의 싸움 이후, 부모들이 상대방과 만나 '진지하면서도 우호적인' 방식으로 상대방을 탐색하고, 이어서 본격적으로 싸우고, 나아가 같은 편끼리도 적이 되어 이리저리 줄창 싸운다. 싸움의 끝은 무대가 실제 전쟁터가 아니므로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피흘리고, 죽고 죽이는 살상의 대학살대신 혼돈의 비극이 될 터. 평온한 가정이, 견고한 사회가, 중후한 인격의 부르주와들이, 가치로서의 언어들이 한 순간에 뒤죽박죽이 되는 그런 풍경일 터. 작품은 솔직하고, 우리가 동경하는 이 같은 선진사회가 섬뜩하다. 이렇게 쓰고도 야스미나 레자, 공연으로 작품이 놓인 세상과 싸우는 연출가 한태숙, 인물들과 싸우는 4명의 배우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살면서 제 스스로와 싸우는 관객들이 있다. 싸움의 최대값인 대학살은 우리끼리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리라. 연극 속에서 연극 너머까지. 두루두루 여기저기. 연극으로, 연극을 무기로 삼고 숨어 있으면서 싸우고, 완장차고 싸우고, 진지를 구축하고 깃발을 휘날리며 싸운다. 아름다운 연극이라고 말하면서, 연 극은 삶이라고 말하면서, 생의 은유라고 말하면서, 연극하는 삶의 고뇌를 예술로 말하면서. 그 싸움의 풍경은 <대학살의 신> 맨 앞, "그러니까..."처럼 숨을 헐떡이며 간헐적으로 혹은 짬 없이 이어지고, 그 끝은, 희곡의 맨 끝처럼, "침묵..."으로 "알 수 없을 터이다. 모두들 대학살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리라. 넌덜머리 나는 싸움은 시도때도 없다.
소통과 폭력의 경계에서 - 임수현 번역자, 서울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현존하는 프랑스 극작가 중 세계적으로 가장 큰 명성을 얻고 있는 야스미나 레자의 최근작 <대학살의 신> (Le Dieu du carnage)을 번역하게 된 것은 역자로서도 행운이었습니다. 2009년 토니상의 주요 부문을 수상한 작품이라는 유명세와는 별개로, 현대 프랑스 연극 전공자로서 레자의 연극을 국내 무대에 소개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대표작 <아트>가 국내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며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은 상태에서, 레자의 최근작을 번역하며 약간의 부담을 느낀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대학살의 신>은 프랑스의 소위 '지성인'들이 벌이는 특유의 냉소적인 말싸움과 해프닝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 우리 문화의 정서와 쉽게 소통할 수 있을지,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나름 고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태숙 연출 선생님과 작품 전반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차츰 이 연극이 지닌 보편적 상황에 대한 윤곽이 잡혀갔고, 배우분들의 꼼꼼하고 열정적인 분석을 거치면서 지극히 프랑스적인 캐릭터들이 우리 이웃들의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싸움으로 발단된 양쪽 부모의 만남, 화해를 위한 시도들, 하지만 각자의 편견과 이기심과 위선으로 인해 서서히 파국으로 치닫는 대화, 기어이 바닥을 드러내고 마는 막장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씁쓸한 과정과 상황은, 나라와 문화를 막론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현실일 것입니다. 처음 작품을 접했을 때는 제목이 주는 무게감 때문에 다소 위축되기도 했지만, 대본을 읽을수록 '대학살의 신'은 결국 '내 안의 파괴적인 욕망으로부터 자라나는 것이라는 작가의 메시지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야스미나 레자의 비판은 소위 '똘레랑스'와 '토론의 문화를 내세우면서 정작은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프랑스 사회의 위선을 향한 것이지만, 이 연극은 우리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수많은 폭력들의 기원에 대해, 소통과 폭력 사이의 그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경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반성의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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