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원작/ 소포클레스, 재구성/ 송선호 '전사의 자식들'

clint 2024. 3. 7. 14:54

 

 

전사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에 앞서 폭풍을 잠재우기 위해

자기 딸 이피게니아를 신에게 재물로 바친다.

이에 원한을 품은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정부 아이기스토스와

음모를 꾸며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아가멤논을 살해하고,

새로 왕위에 오른 아이기스토스를 뒤에서 조종한다.

아가멤논의 둘째 딸 엘렉트라는 위험에 처한 동생 오레스테를 도망보내고

권력에 저항하며 어두운 곳에서 갇혀 지낸다.

이와 반대로 복종하며 살아가는 막내 딸 크리소테미스는 엘렉트라를

설득하려 하지만 그녀는 동생을 비난하며 오레스테스가 돌아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날 만을 기다린다.

권력을 손에 쥔 아이기스토스는 아버지와 형제들의 원수를 갚은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주장하지만 언젠가 오레스테스가

돌아와 자기에게 복수하리라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늙은 하인의 손에 맡겨졌던 오레스테스는

7년만에 성인이 되어 아버지의 땅으로 돌아온다.

늙은 하인이 먼저 오레스테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전하고, 오레스테스는 그 유골을 가시고 온 이방인으로 가장하여

누이 엘렉트라를 만난다. 어릴 적부터 죽은 딸에게만 병적으로 집착하는

어머니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한 오레스테스는

자기를 보살펴준 누이에게 남다른 정을 느껴왔다.

그런 누이가 노예처럼 비참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자

분노에 몸을 떤다. 자기 어머니를 죽여야 하는 운명때문에 괴로워하던

그였지만 아버지를 빼앗은 자와 동침하며 권력을 휘두르는 부정한 여인을

더 이상 어머니라 부를 수 없다며 칼을 뽑은 오레스테스는 살아 돌아온

자식의 발 밑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어머니를 찌르고

뒤따라 들어오는 병든 아이기스토스마저 죽인 뒤

피 묻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한다.

 

 

〈전사의 자식들〉은 희랍신화에 나오는 아트레우스가의 이야기 중에서 그 마지막 자식들이 겪는 비극적인 삶에 초점을 맞춰 구성한 작품이다.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를 다룬 세 작가의 작품 중에서 극적 구조와 인물 간의 갈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는 점을 들어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기본 텍스트로 정했지만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이 집안에서 일어난 비극적 결말을 놓고 봤을 때 완결된 작품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소포클레스의 플롯을 중심으로 하되 인물들의 행동과 성격에 있어서는 신화 속의 전후 사건과 그것을 다룬 작품들을 토대로 많은 부분을 각색하거나 첨가시켰다고 볼 수 있다. 구성본의 전반부에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 (Iphigenia in Aulis :Euripides)와 아가멤논(Agamemnon:Aeschylus)중에서 이피게니아가 희생되는 장면과 아가멤논이 살해되는 장면을 삽입된다. 이는 극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인물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엘렉트라만을 놓고 봤을 때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의 행동을 이해하기란 힘들기 때문이다. 구성본에서 오레스테스의 성격은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The Libation Bcarers: Aeschylus)에서의 성격과 흡사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서서히 운명의 힘에 이끌려 들어간다. 이것은 구성본에서 설정한 폭압적인 환경을 엄두에 두고 개개의 인물들이 갖는 비극적 결합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다르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크리소테미스는 소포클레스의 작품에만 등장하는 인물로 엘렉트라와 갈등을 일으키면서 주인공의 의지를 부각시켜줄 뿐만 아니라 사건 전개를 매끄럽게 해준다. 구성본에서는 이 인물을 다른 비극적인 인물들과 강하게 대비시켜 마치 현대인이 극중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코러스들은 원본에서와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그 느낌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재구성의 글 - 송선호

저마다 연극에 대한 믿음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겠지만 지금처럼 다양함보다는 혼탁한 기운이 느껴질 때 연극과 연극적인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껍질을 모두 벗겨내고 나면 남아있을 본질적인 어떤 것이 보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그 원형적인 모습을 통해 정말 <연극적인 연극>이 어떤 것인지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다시 희랍극으로 다가갔다.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희랍극은 우선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의 모습이 있다. 그들은 강한 믿음을 가지고 행동한다. 자신이 정당하게 서는 것을 가로막는 힘에 대항하며 질서에 도전한다. 결국 파멸에 이르는 그들의 불행을 보면서 비극적 결함을 말하지만 그것을 인간적인 약점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행동은 신화와 비극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행동과 대별된다. 수동적이고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비극 속의 인물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이런 것이 바로 연극을 연극적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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