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르바트가 1936년에 집필하고, 1937년에 인쇄해 4월 2일 프라하에서 초연한<피가로 이혼하다>에는 보마르세가 쓴 두 편의 '피가로- 희극'<세비야의 이발사>와<피가로의 결혼>과 로시니, 모차르트의 오페라로도 잘 알려진 고전적인 소재가 사용되었다. 호르바트는 이 소재에 풍부한 착상을 담아 가혹한 삶을 사는 이민자 희극이라는 속편을 만들어, 혁명이 일어난 후 몇 년 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 주면서, 혁명극과 결혼에 관한 멜로드라마를 결합한다. 동시에 현실적이고 시대를 초월하는 망명자들의 운명을 묘사한다. 유고에서 발견된 극 서문에 호르바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희극<피가로 이혼하다>는 보마르세의<피가로의 결혼>이후 몇 년 후에 시작된다. 그러나 나는 이 극을 우리 시대에 진행하도록 했다. 혁명과 망명 문제는 첫째,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고 둘째로 우리 시대가 특히 당면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희극에서 일어난 혁명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모든 혁명을 의미한다. 모든 폭력적 전복은,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중시하기도 하고 경시하기도 하는 개념과의 관계에서 공통분모를 갖기 때문이다.<피가로의 결혼>에서는 근접한 혁명의 번개가 멀리서 번쩍이고 있지만,<피가로 이혼하다>에서는 예측이 가능한 번개처럼 번쩍이는 것은 없다. 인간성은 뇌우를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비치는 약한 빛일 뿐이다. 더 세찬폭풍이 그 빛을 꺼버릴 수 없기만을 바란다."

작품 내용을 살펴보면, 피가로가 예언한 대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 알마비바 백작과 백작부인은 국경을 넘어 피신한다. 수산네는 충성심에서 백작내외를 따른다. 피가로 역시 아내 수산네에 대한 사랑 때문에 혁명을 배반하고 그녀와 함께 백작을 따라 망명한다. 국경을 넘어가면서 시대 배경은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로 넘어간다. 혁명이 곧 끝날 거라고 낙관한 백작 내외는 호화 호텔과 카지노를 전전하다가 재산을 잃고 결국 초라한 방에서 궁색한 삶을 산다. 그러는 동안 백작부인은 이국땅에서 죽고, 혼자가 된 백작은 궁핍 때문에 사기와 횡령을 저지른다. 한편 망명 직후에 곧 주인과 작별한 피가로는 그로스하더스도르프에서 미용실을 인수해 성공적으로 영업한다. 하지만 혁명 예언자로서 "세계시민”을 자처했던 그는 자유롭고 자립적으로 사는 대신, "속물”이 되어, 이전에 백작에게 굽실거렸듯이, 지금은 열심히 고객 비위를 맞추며 굽실거린다. 피가로는 세상사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으로 자식을 낳지 않으려 한다. 아기를 갖고 싶어 하는 수산네의 소원은 좌절된다. 수산네는 이전에 알마비바 백작에게 추근 거림을 당했듯이, 이제는 부 산림관의 유혹을 받는다. 결국 수산네는 그의 유혹에 넘어가 피가로와 이혼한다. 피가로는 혼자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동안 고향에 남아 혁명에 가담했던 사람들 일부는 부패했고, 또 다른 일부는 혁명 이전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파괴적이고 과격하던 혁명은 어느 정도 완화되고 인간적으로 변한다. 피가로는 그동안 고아원으로 변한 알마비바 백작의 성 관리인이 된다. 그는 항상 그때그때 권력을 가진 자와 화해한다. 처음에는 혁명의 선구자였고, 그다음에는 기회주의적인 속물이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이념적 편견 없이 행동하는 현실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그는 이국땅에서 취업 허가가 만료되어 일자리를 잃고 추방 직전에 귀향한 수산네를 다시 받아들인다. 그녀는 이혼 후에 이민지들이 모이는 카페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피가로는 또한 사기꾼으로 외국에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출감된 뒤 수산네에게 이끌려 고향으로 돌아온 노 백작도 이전에 살던 성안 자기 방에서 다시 살도록 하며 그에게 편안한 만년을 허용한다.

호르바트는 피가로가 작품 마지막에 “이제 비로소 혁명이 승리했습니다, 혁명의 적이 되는 데 아무런 책임이 없는 사람을 지하실에 감금할 필요가 없어지면서부터 말입니 다” (3막3장)라고 말하듯이, 이 작품에서 인도주의 정신의 대변자로 나선다. 이 문장은 혁명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반혁명적이지도 않은데, 디터 힐데브란트가 지적했듯
“인간적 면모를 지닌 사회주의"를 생각나게 한다. 호르바트가 그린 그러한 박애주의 이면에는 비정치적이고 비역사적 인 소박함이 상당 부분 숨어 있다. 프랑스 혁명을 비유한 게 아니라고 해도, 이 작품이 쓰였던 1936년에 민족사회주의를 접했던 작가는, 독일 파시즘이 자칭 "민족 혁명”을 표방했음을 틀림없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저쪽은 그야말로 지옥이에요! 여러분은 전혀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아무리 대담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해도요! 오직 범죄와 약탈, 살인, 그리고..”(1막 2장)와 같은 문장도 1936년 어떤 무렵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오해의 여지가 없다. 알마비바 백작도 그전 상황을 천국과 지옥으로 대비하며 묘사하고 야유한다. "나는 지옥에서 나와서, 구출된 것을 하늘에 감사 하고 있는데, 이제 범죄자처럼 취급되고 있소.” (1막2장)

그러나 이런 비판적 발언은 정치적인 강조로 이해되지 않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희곡 작법상의 혼란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작가나 관객이 프랑스 대혁명이 배경인 피가로의 세계와 호르바트를 비롯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망명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당시 히틀러가 장악한 권력의 세계 사이에서 계속 오락가락하며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호르바트는 보마르세와 모차르트가 그린 매우 바람직한 작은 혁명을 암시하는 한편, 나치가 지배한 당시 독일을 겨냥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국경을 넘는 네 사람은 1789년 프랑스와 1933년 독일, 또 어떤 면에서는 1917년 러시아에서 도주 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번은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혁명적 요구를 피해서, 한번은 강제수용소를 피해서 도주한다. 백작이라는 인물에게 그것은 단 한 가지 결과, 단순히 살아남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으나, 피가로에게 그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입장을 취하게 한다. 거의 혁명가 면모를 갖춘 피가로가 백작 내외와 함께 도망하게 되는 동기는 수산네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 때문임을 호르바트는 보여 준다. 그러나 이후에 결혼이 깨지면서 희곡 작법에서 보이던 일관성도 이중으로 깨진다. 그리고 피가로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성 관리인으로 임명되는데 이는 대립적 문제를 귀향으로써 무마시키는 감미로운 오페레타 인상을 준다. 이 희극은 "모두들 서로에게 친절하라.”는 제스처로 끝나는 것이다. 호르바트의<피가로 이혼하다>를 매력적이고 감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망명, 향수, 어쩔 수 없이 택한 이민 문제다. 호르바트는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자기가 처했던 상황, 곤경, 불쾌한 일들을 묘사했다. 작품에서 고향에 남아 있던 페드리요가 돌아온 피가로에게, "망명자는 언제나 떠돌이고 고향도 없는 거야, 고향을 배신했기 때문이지” (2막3장) 라고 말할 때는, 호르바트가 경험 했던 바를 듣는 것 같다. 이 극에서 혁명은 긍정적인 유토피아로 변해서, 처음에 현실적으로 전개되던 이민자 주제에 동화 같은 결말이 부여되지만, 이민자로서 피가로가 가지고 있던 비관주의는 오페라 같은 화해적 결말보다 더 설득력 있고 인상적이다. 이렇게 무대효과가 큰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분위기를 풍성하게 보여주는 세부 사항 묘사와, 함축적인 대화, 등장인물에 대한 세심한 개성 묘사 덕택 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1937년 4월 2일 프라하 독일극장 소극장에서 초연했으며, 아놀트 마를레가 연출하고 무대미술은 프랑크 슐테크가 맡았다. 1963년 이 극은 작곡가 기젤헤어 클레베에 의해 오페라로도 만들어졌고, 1999년에는 텔레비전 극으로도 제작되었다.

작가소개
외된 폰 호르바트(Od6n von Horvdth)는 1901년 12월 9일 피우메에서 태어나 합스부르크의 다민족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굴곡 많은 청춘기를 보낸다. 크로아티아 왕국 항구 도시 피우메에서 형가리외교관이었던 아버지 외된 요제프 폰 호르바트와 어머니 마리아 룰루 헤르미네 레날사이에서 태어난 호르바트는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거주지를 많이 옮긴다. 아버지는 소귀족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군의관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902년에 베오그라드로, 1908년에는 부다페스트로 이사한다. 여기서 호르바트는 가정교사에 게 헝가리어로 교육을 받는다. 1909년 그의 아버지는 뮌헨으로 근무지를 옮겼으나 호르바트는 부다페스트에 남아 대주교가 관할하는 기숙학교에 다닌다. 1913년에 뮌헨에 있는 부모에게로 가서 처음 독일어를 배운다. 그 후 프레스부르크와 부다페스트를 거쳐, 빈에 있는 외삼촌 집에서 1919년 고등학교를 마친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 네 번이나 다른 언어로 수업을 받았고,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다른 도시에 있는 학교에 갔다. 처음 독일에 갔을 때, 나는 신문을 읽을 수 없었다, 모국어는 독일어였지만 고딕 철자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열네 살에 비로소 처음으로 독일어 문장을 썼다.” 그는 김나지움을 마치고 같은 해에 뮌헨대학에 입학해, 심리학, 문학, 연극학, 예술학 강의를 듣는다.

호르바트는 1920년 《춤의 책(Das Buch dcr Tiinzc)>으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뮌헨에서 《짐풀리치시무스》를 간행하는 잡지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1924년부터는 베를린에서 문학 활동을 펼쳤는데, 극작품 열여덟 편 이상, 장편소설 두 편을 창작하는 데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호르바트는 수십 년 동안 잊혔다가 1970년대에 와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가 목록에 들어가고, 크뢰츠, 슈페어, 투리니 같은 이 시대 신민중극 극작가들의 본보기가 된다. 그가 상황을 묘사하고 정확히 분석하는 방법은, 개인의 운명을 일반적인 사회적 위기의 징조로 묘사하는 것이고, 이는 현실성 있으며 시대에 부응한다. 그는 자기 작품을 “민중극” 이라 부르면서 사회 비판적 시대극을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시킨다. 시대극은 계몽적인 인상을 줘야하고 "의식의 정체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충분히 의식적으로 오래된 민중극을 형식적으로, 윤리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민중극 형식을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이때 나는, 고전적인 민중극 작가들보다 민중가수와 민중 희극 배우의 전통에 더 많이 의지한다.” 그가 말한 전통은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있었던 인플레와 대량 실업 시대에 나온 당대 연극들이다. 호르바트는 소시민들의 일상에서 드러난 실상을 그린다. 궁핍과 삶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들은 범죄자가 되거나 사악해진다. 때로는 사상도 팔고 나치 정권에서 거수기가 되고 동조자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등장인물들이 겪는 절망과 곤경은 그들이 사용하는 절망적인 언어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호르바트는 그런 언어를 "교양 은어”라고 정의한다. “오늘날 인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으려면, 교양 은어를 말하게 해야 한다. 교양 은어와 그 원인들은 당연히 비판을 도발한다. 그렇게 신 민중극의 대화가 발생하고 극적 사건이 생긴다. 진지함과 반어의 종합이다.” 호르바트가 묘사하는 소시민들은 오직 상투어로, 공허한 사고 모형에 따라, 틀에 박힌 말로만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 비개성적이고, 내용 없고, 의식과 사고를 위축시키는 고정된 표현 방식이다. 또 이런 등장인물들의 갑갑하고 소외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언어 상실이다. 이 소시민들이 극 중에서 아무리 유쾌하고 기분 좋은 것을 경험한다 해도 감동과 값싼 감상 등 정이 넘쳐흐르는 얼굴 뒤에 잔인성과 비열함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호르바트는 보여 준다. 호르바트는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표현주의 경향을 따른다.
주요 작품과 내용을 간단히 소개한다.<모렌 골목 의 살인(Mord in der Mohrcngasse)>(1923~1924)은 탕아에 대한 멜로드라마다. 가족을 구하기 위해 주인공은 보석상에 들어가 강도 살인을 저지른다.<산상 철도(Die Bcr^bahn)>(1926)에서는 한 갱부가 공명심과 이익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죽음을 맞을 때 일어나는 노동자 소요를 다루고 있다. 희극<전망이 좋은>(1926)에서는 인플레 때문에 경제력을 잃은 남자들이 유산을 상속받기로 되어 있는 젊은 크리스티네를 얻기 위해 야비한 술책을 쓰며 서로 싸운다.<슬라데크, 검은 제국군인 (Sladek dcr schwar/e Rcichswchrmann)>(1929)에서 처음으로 정치적 현실을 다룬다. 비밀재판으로 극우파 의용군을 실해하는 것에 반대하는 동시에 젊은 실업자 슬라데크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오직 먹고살기 위해 "나치스 신봉자들”과 결탁하고, 여자 친구가 위험인물로 몰려 제거 되는 것을 보며, 파시즘을 위해 행진한다. 〈의회 주변 (Rund um den KongreB)>(1928~29)은 성매매업과 투쟁하기 위한 회의를 다룬 익살극으로 사무총장들과 전권 대리인들이, 자신들이 타도해야 한다는 포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성 매매업으로 이익을 얻고 있음을 풍자하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다민족 동맹의 해”에 열렸던 여러 회의들에 대한 공격으로, 그 회의들이 결실 없이 낭비도 많고 자기들끼리만 관리해 실패했음을 비판한다.<이탈리아의 밤(Italienischc Nacht)>은 1931년 시프바우어담 극장에서 초연했다. 이 작품은 바이마르공회국의 정치적 상황, 좌파와 우파 사이의 잠재적 시민전쟁, 민주주의 붕괴과정 등을 단골 주점에서 일어나는 익살극으로 만들어 사회적인 충격을 주려고 시도한다. 마을 차원에서 일어나는 파시즘과의 대결을 보여 준다. 포르바트는<빈 숲 속의 이야기(Geschichten aus dem Wiener Wald)>(1931)와 〈카지미르와 카롤리네 (Kasimir und KaroUne)>(1932)로 작가로서 결정적인 인정을 받는다. 〈빈 숲속의 이야기>는 독일대표 극장인 '도이체스테 아터’에서 하인츠 힐페르트가 막스 라인하르트 극단 배우들을 데리고 공연했다. 이 작품에서 호르바트는“아름다운도 나우 강변"의 "조용한” 골목과 전원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일어나는 협박, 구타, 사기, 영아 살해를 그리며, 비판적 사실주의라는 의미에서 현대 드라마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작품을 만든다. 그는 이 작품으로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한다.<카지 미르와 카를리네>는 뮌헨 옥토버 페스트의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슬픈 사랑 이야기다. 사람들이 너무 불행해져서 사랑과 인간성이라는 사치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을 보여 준다.
망명 시기에 나온 그의 작품들은 민중극이라기보다 우화에 가깝다.<센 강에서 온 미지의 여인(Die Unbekanntc aus der Seine)>(1933)은 비합리성을 가미한 교화 극이며, 〈하늘을 향해(Himmelw5rts)>(1934)는 악마에게 끌려가는 어느 극장장에 관한 현대판 신비극이다.<이리저리 (Hin und her)>(1934)는 여권 없이 두 나라 국경사이에 있는 다리 위에서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드럭 스토어 주인에 관한 비극적 익살극으로 나치에게 계속 쫓겨 다니던 호르바트가 자기 상황을 가차 없이 풍자한 작품이다.<믿음 사랑 소망(Glaube, Liebe, Hoffming)>은 합법적인 허가증 없이 행상을 했다고 처벌받고 실직한 뒤, 약혼자에게 버림받고 물에 뛰어드는 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다.<돈 후안 전쟁에서 돌아오다(Don Juan kommt aus dem Kricg)>(1936)와<피가로 이혼하다>(1937)에서는 고전적인 소재를 현대 로 옮겨 놓는다.<남자들 없는 마을<Ein Dorf ohne Miinner)>(1937~1938)에서는 민족의 광기와 박해라는 현실적 주제를 역사적으로 변화가 많았던 헝가리로 배경을 옮겨 표현했다.<최후의 날(Der jungste Tag)>(1935)에서는 어느 하급철도관리가 잘못해서 일어난 사고로 열여덟 명이 죽는데, 그는 여자 증인 아나로 하여금 위증하게 해 자신의 죄를 숨긴다. 그러다가 과거로부터 벗어나려고 공범자를 살해한다. 결국 그는 법정에 서게 된다. 교회 극으로 끝나는 〈폼페이, 지진 코미디 (Pompeji. Komodie cincs Erdbcbens)>(1937)에서 로마노예 톡실루스는 불의의 사회에서 오직 사기를 쳐야만 사랑과 인간다움에 대한 권리를 실현할 수 있다. 그는 체포되고, 사람들은 그를 사자들 앞에 던지려고 한다. 처음에는 화산 폭발로 인한 생지옥과 새로운 기독교 질서에 대한 희망이 그를 살게 한다. 세계 전쟁에 대한 공포를 고대 세계로 옮겨 조명한 작품이다. 호르바트는 카를 추크마이어 추천으로 당시 문학적으로 큰 영광인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한다. 이런 성공 때문에 나치는 같은 시기에 호르바트에 대한 공격을 강화한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한 후<믿음 사랑 소망>리허설이 취소되고, 호르바트는 잠시 연금 상태에 있다가 빈으로 도주, 나중에는 잘츠부르크 근교 헨도르프로 옮긴다. 정치적인 변화에 따라 독일어권 극장에서 작품이 공연될 가능성이 줄어들자, 그는 시대 비판적인 장편소설 《신 없는 청춘(Jugend ohne Gott)》, 《우리 시대의 아이(Ein Kind unscrer Zeit)》(1937)를 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되면서 호르바트는 또 다시 도주한다. 헝가리, 프라하, 암스테르담을 거쳐 파리에 도달한 그는 1938년 6월 1일 어처구니없게 때 이른 죽음을 맞는데, 샹젤리제 거리에서 벼락에 맞아 쓰러지는 나무에 깔려 사망한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테네시 윌리엄스 '카미노 레알' (1) | 2015.11.10 |
|---|---|
| 헤롤드 핀터 '파티 타임' (1) | 2015.11.10 |
| 마리보 '노예들의 섬' (1) | 2015.11.10 |
| 후안 끼베스따니 '우르따인' (1) | 2015.11.10 |
| 사르트르 '무덤없는 주검' (1) | 2015.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