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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메일 '세잔느를 찾아서'

clint 2023. 5. 6. 20:58

 

 

피터 메일의 <세잔느를 찾아서>는 바로 후기 인상파의 거장인 프랑스 화가 폴 세잔느 (1839 - 1906)의 작품을 위조해 거금을 챙기려는 미술품 거래업자와 이를 추적하는 한 사진

작가의 이야기이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태생인 세잔느는 고흐처럼 생전에 그림 한 장 팔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없진 않았으나, 대체로 화상들의 주목을 끌지 못한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는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기에 말년에는 고향에 칩거하다시피 하며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잔느가 사후에 큐비즘(입체파)의 원조라는 평가를 받게 되자 그가 남긴 작품들도 피카소의 인기에 실려 끝없이 치솟았다. 생전에 그의 작품을 쉰 떡 보듯 밥 맛 없다는 표정을 짓던 화상들이 새삼 입맛을 다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은 미술품의 위작 거래에 얽힌 흑막을 파헤치려는 본격적인 범죄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프랑스인보다도 더 프랑스를 사랑하는 한 영국출신 작가의 프랑스에 대한 애정을 담은 성격이 짙다. 피터 메일은 1939년 영국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나 카리브 해의 바베이도스에서 대학을 졸업하는 등 다국적인 삶을 살다 마침내 프랑스에 정착했다. 그는 프랑스를 사랑했고, 특히 프로방스 지방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가 프로방스에서 제대로 짐 보따리를 풀기도 전에 이 지방의 풍경과 인정을 소재로 쓰기 시작한 <프로방스에서의 1>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메일은 그것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던지, 그 후에도 <언제나 프로방스>라는 속편을 내놓았고, <세잔느를 찾아서>도 그것의 속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은 소설이기 때문에 앞서 말한 작품들과는 다르지만, 이 작품 역시 작가가 가장 프로방스적인 작가로서 그곳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메일의 프로방스 사랑이 단순한 풍경과 인정의 차원을 넘어 프로방스 예술인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한 것이자, 글 쓰는 세잔느가 활자라는 물감으로 '세잔느가 있는 풍경' 이라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그림이나 범죄 이야기 못지않게 프랑스의 풍경과 음식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프랑스의 풍물기 같은 느낌마저 준다. 얼핏 보아 그는 프랑스의 미술보다 그들의 입맛의 예술이라고 할 미술을 더 사랑하는 것만 같다. 그런데 이 영국계 작가의 프랑스 사랑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미국 사치에 대한 염증으로 이어진다.

"유럽공동체가 이루어지면 프로방스는 유럽의 캘리포니아가 될 것이라고들 말한다. 나로선 그들의 예측이 틀리길 바란다. 식이요법에 미친 사람들이 더블니트 조깅복을 차려입고 생수를 마시려고 몰려 올 것이고, 수영장 옆엔 무선전화가 설치되고, 테니스 코트 옆에는 거품목욕기가 들어설 게 눈에 선하기에 ......"

그는 <세잔느를 찾아서>에서 이런 인정에 유난히 추운 겨울날씨까지 곁들여 뉴욕을 범죄만이 무성할 뿐 메마르고 검고 추운 도시로 그리고 있다 한마디로 이 영국계 작가는 18세기에 있었던 미국 독립전쟁을 되새기듯 미국을 미워할 뿐 19세기에 있었던 나폴레옹 전쟁은 모른다는 어투다. 그러나 메일에게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비롯해 영국과 오랫동안 적대관계에 있어 온 반면, 미국은 한때 집안싸움은 했지만 앵글로 색슨계의 한 식구라는 등의 족보 설명은 무의미하다. 이 코스모폴리탄 적인 작가에게는 영국 그 자체도 여권의 한 칸에 써 넣는 단어의 의미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 그가 스치듯 보여 주는 영국 풍경이 이를 말해 준다. 주인공이 찾아다는 램프리 경의 집안 모습은 고풍스러운 저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집안사람들 마음씨는 아일랜드 영화의 빈촌 풍경처럼 메마르기만 하다.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램프리 경부터 하인까지 모두 비정상이다. 그것은 얼핏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같은 작품의 등장인물들과도 다른 이방인들의 모습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모국의 풍경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19세기의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보낸 글처럼 먼 곳의 풍경을 담은 것이다.

 

사실, 그는 세잔느처럼 프로방스 출신의 작가다. 세잔느는 타향을 떠돌다 고향인 프로방스에 정착한 반면, 메일은 세계를 떠돌다 이역인 프로방스에 정착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에 불과할 뿐이다. 세잔느는 프로방스의 풍경이 좋아서 프로방스에 정착했고, 메일은 프로방스의 풍경과 인정을 좇아 그곳에 정착한 것이다. 메일은 프로방스의 작가일 뿐 아리라, '인상파적인 소설가' 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국제적인 범죄 조직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전율적인 플롯과는 달리, 살상이 한 건도 없다. 살상은커녕 상처도 입지 않는다. 대부분의 범죄소설이 악당들의 처절한 최후라는 피비린내 나는 요리를 후식으로 삼는 것과 달리, 이 소설에서는 그들이 그저 낭패당한 표정만 짓는다. 아니 그보다도 이 소설에는 원래 '악당'이 없고, 그저 '욕심 많은 사람' 정도가 등장한 셈이다. 따라서 살인 청부업자 파라두도 어딘지 어리숙하고 순박할 뿐이어서 그 모습은 세잔느의 <성 안트완의 유혹>을 연상케 한다 숲속에서 남녀들이 노닐고 있는 이 그림의 한 구석에는 이를 훔쳐보는 듯 한 사나이가 서있다. 그림의 주제와 상관없이 부랑아 같은 파라두 역시 그런 정도의 부류로만 보인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해 이 소설은 위대한 미술가들의 고통스러운 창조적인 삶의 소산인 미술품들이 처한 운명을, 프로방스를 배경으로 한 경쾌한 모험을 밑그림 삼아 희비극적인 터치로 그린 이야기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