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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뒤렌마트 '약속'

clint 2023. 2. 3. 11:43

 

 

뒤렌마트는 그의 추리소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약속에서는 객관적인 결과조차 제시하지 않는다.

 

본디 이 소설의 전신(前身)은 뒤렌마트가 영화 연출가 라자르 벡슬러의 요청을 받아 영화 시나리오로 쓴 작품이다. 이 영화는 그 사건은 화창한 대낮에 벌어졌다.’ 1958년 미성년자들에게 저질러지는 성범죄를 경고할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뒤렌마트는 같은 해 이 대본을 대폭 개작해 소설로 발표하면서 이를 자신의 창작에 있어서 유미적 태도와 세계판을 개진하는 기회로 삼았다.

창작에 대한 작가의 견해는, 이 소설에서 틀을 이루는 1인칭 화자인 추리소설 작가와 전직 경찰서장 H박사의 토론을 통해 펼쳐진다. 이어서 틀 속의 이야기로 소설 줄거리가 삽입된다. 따라서 이 소설의 골격을 스케치하면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1)  ; 작가인 화자와 H박사의 만남 - 추리소설에 대한 토론 - 주유소에서 마태와의 만남

2) 틀 내부의 이야기 ; 수사관 마태의 케이스

a) 그리틀리 모저 살인 사건 - 마태의 약속

b) 혐의자 폰 군텐의 죽음(수사 1)

c) 솔방울 거인에 대한 가설과 그것의 입증실패(수사2)

d) 슈로트 부인의 보고(사건 전 이야기)

늘 속의 이야기에는 두 차례의 수사 과정이 삽입되어 있다 그 중 첫 번째 수사 과정은 기존 경찰 기구의 작품으로, 겉보기에 명백한 결과를 얻은 다음 종결된다. 살인 혐의자인 행상 폰 군텐이 경찰의 연속 심문에 못 이겨 자백을 강요받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자살하고 마는 것이다. 이 행상의 자살 장면은 사고 종결부를 재구성한 모습이다 두 행상 모두 창틀에 매달려 죽는다. 그러나 이들 양자의 자살 동기는 판이하다. 트랍스의 자백은 자발적인 것이요, 본연의 자아를 인식하는 절정의 순간에 나온 것인 반면, 폰 군텐의 자백은 강요된 것이요, 고문 같은 고통스런 현실을 단축시키는 방법이다. 바꾸어 말하면 트랍스가 현실과 유희의 경계 지점에서 죽어갔다면, 폰 군텐은 강요된 자백과 외계와의 경계 지점에서 죽어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폰 군텐은 현실의 법 기구가 저지른 오류의 희생물인 셈이다. 그러나 수사관 마태는 이러한 귀결로는 목숨을 걸고 했던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다.

두 번째 수사는 마태의 도덕적 책임을 바탕으로 개인적 차원에서 재개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마태가 세운 가설과 계산한 바를 입증하려는 시도로 일관된다. 가설을 세워가는 마태와 의사 로허의 담화는 혐의에서 베르라하와 홍거토벨 간에 벌어진 토론 장면의 변용이다. 그러나 가설 이후 상황은 각기 판이하게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혐의에서 베르라하는 그나마 지신의 가설을 입증할 수 있었던 반면, 마태의 가설은 끝내 한낱 허구로 남는다. 헬러의 아이를 미끼로 쓴 마태는 챤츠를 도구로 썼던 베르라하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도덕성에 위배되는 모순에 빠진다. 범죄자는 끝내 그의 함정에 걸려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의 실패는 결코 가설의 결함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불운의 형태(알베르트 역시 트랍스처럼 자동차사고를 당한다)로 덮친 우연이 장애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인 것이다.

마태는- 자신이 쳐놓은 사고(思考)의 그물에 스스로 얽혀 허우적거리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으로 살아 있다. 작가는 왜 이토록 참담하게 실패하는 수사관을 제시했을까?

물론 우선적으로는 19세기 소설의 유능한 탐정들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계산했던 것 외곽에서 우연의 형태로 위협하는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상대해야 할 적수임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듯 지금은 신이나 정의, 5교향곡의 운명이 위협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보다는 무수한 교통사고, 부실공사로 인한 제방 붕괴, 방심한 한 기술자가 불러일으킨 원자탄공장폭발, 잘못 조절해놓은 부화기 등의 위협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이렇듯 사고(事故)들의 세계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추리소설에 부치는 진혼곡이라는 부제를 붙인 이 작품을 끝으로 (수사관 마태의 별명 역시 이라는 뜻) 뒤렌마트는 다시는 추리소설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작가가 의도했든 안 했든 이 소설은 현대 세계 안에서 추리소설이 존속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 보이고 있다. 추리소설의 인습적 공식을 깨부수는 작업에 주력했으되, 결과적으로 이 소설은 미묘한 추리적 요소를 업고 새로운 주제의 내용을 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추리소설을 지양하는 동시에 극복하고 있으며, 이 장르를 아직도 가능한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

 

전통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아슬아슬한 스토리를 쫓아가며 수수께끼에 참여하는 맛은 별로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책을 덮으면서 개운 찮은 마음을 털어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무엇인가를 독자의 마음속에 침전(沈澈)시키는 글을 쓰는 것, 그래서 개개의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에 대해 재고(再考)해보고 눈을 뜨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코미디 작가의 궁극적인 창작 목표라는 점을 감안할 때, 독자 여러분 역시 트랍스처럼 노련한 작가가 쳐놓은 함정에 빠져드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