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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뒤렌마트 '법'

clint 2023. 2. 1. 20:20

 

 

우리는 법치국가, 법을 정의와 거의 동일시하는 사회에 살면서도 진정 법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또 깊이 생각하지도 않는다.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막연히 믿을 뿐이다. 세상을 뒤흔들고 신문지상을 요란하게 장식하는 수많은 부조리한 사건들, 사실이라 믿기조차 어려운 일들인데도 당사자들은 법을 어긴 적이 없다고, 법대로 하자고 목소리를 드높인다. 누구를,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혼돈스럽기 그지없다. 이렇게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세태에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소설 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착잡한 마음으로 많은 생각을 하였다 법이란 과연 무엇인지 그 실체와 모순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1921199이는 스위스 출신으로 1945년 이후 독일어 문학권내에서 유럽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노부인의 방문' ’물리학자들' ‘로물루스 대제 등 뛰어난 희곡 작품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무대에 올려져 낯설지 않은 작가이다 그는 16편의 희곡 작품 이외에 을 비롯하여 판사와 형리』 『혐의』 『약속 등 수편의 장편소설과 방송극 등을 남겼다

뒤렌마트가 문학을 통해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이다. 현대사회는 외형상 비대할 뿐 아니라 복잡 미묘하게 뒤엉켜 있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얼핏 간단하고 명백해 보이더라도 상호 모순되는 원인과 예측할 수 없는 결과들로 얽혀 있어 실상을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애나 윤리보다는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이해관계이다 뒤렌마트는 이런 현실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를 과연 얼마만큼이나 존중하고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집요하게 파고 든다. 진실과 도덕, 죄와 정의의 문제는 부단히 변화하고 심화하면서 시종일관 그의 문학의 저변을 흐르는 중심 테마이다.

그의 광대하고 심오한 성찰은 정의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항시 이것으로 되돌아온다

 

은 뒤렌마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1957년 집필을 시작했으나 사정상 중단되었다가, 세상을 뜨기 몇 해 전인 1985년 완성한 작품이다. 이 소설 역시 작가가 수십 년에 걸쳐 추적한 현대사회와 정의의 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어처구니없는 한 살인사건을 통해 정의의 파수꾼 이라 불리는   정의의 함수관계를 흥미 있고 심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실용성, 공리성을 내포하는 법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정의의 이념과는 다르고, 어떤 면에서는 대립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정의의 수호신으로서 법의 이념은 과연 얼마나 충족되고 있는가?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미로와 같은 현대사회에서 자유와 안영을 지키고 정의를 수호하는 사명을 젊어진 법의 허와 실, 그 모순, 저명한 법조인들의 실상을 깊이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살인과 자살을 통해 진실과 정의를 수호하려는 신출내기 변호사 펠릭스 슈패트의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된다. 노련한 변호사이면서 주 참의원인 이자크 콜러는 세상이 다 아는 살인범인데도 법의 허점을 이용해 당당하게 무죄 판결을 받고, 대신 무고한 사람이 살인범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다. 법을 잘 아는 자,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 앞에서 법은 너무도 쉽게 스스로의 권위를 포기하고 무릎을 꿇는다. 더 나은 자에게 유리한 고지를 부여하는 게임 규칙에 따르는 소극(笑劇)으로 전락하면서, 법은 정의의 이념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참의원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슈패트는 이런 현실에 직면해, 그를 처형함으로써만 추락한 정의를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을 내던져 법과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정의의 광신자 슈패트의 노력은 맨손으로 풍차에 달려드는 돈키호테처럼 무모하고 황당해보인다. 현대사회의 벽은 혼자만의 힘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한 사람을 처형한다고 법과 정의가 회복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희극적인 면이 없지 않은 그의 모습에 동정심과 감동이 이는 것은 왜일까? 세상에 눌려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영웅적인 인물, 범인(凡人)들은 엄두내지 못하는 일을 감행하는 기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자칫 딱딱하고 지루할 수 있는 법이라는 소재와 주제를 뒤렌마트는 예리한 사고력과 상상력을 토대로 흥미진진하게 엮어나가고 있다. 예술성과 재미, 섬뜩할 정도의 진지함과 그로테스크한 유머, 정신과 감정이 균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상상력을 뛰어넘는 심리적 반전이 이어지면서, 책을 손에서 내려놓기가 어렵다. 작가는 범죄소설의 묘미인 극적 긴장을 더하기 위해 사건의 결정적인 전모를 끝까지 숨겨놓는다. 결말에 이르러 헬레네의 고백에서 극적 긴장은 절정을 이루고, 독자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모든 의문이 해결되고 사건이 종결되기보다는 오히려 쌓이는 의문 앞에서 당황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실체는 무엇이며, 법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법은 정의의 이념이 요구하는 대로 정의를 실행하고 있으며, 우리는 정의의 수호신으로서 법을 얼마나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잘 알고 이용하는 사람 앞에서 법이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 있다면 영영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정의를 실현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슈패트처럼 뒤늦은 것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뒤렌마트는 이런 모든 문제를 우리에게 과제로 남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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