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소설의 기본 요소 및 구조는 세부적인 변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어도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통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이러한 장르의 소설에서는 수수께끼로 대두되는 범죄가 사건의 발단을 이룬다. 이 범죄는 흔히 살인이다. 이 같은 극단적 범죄를 내거는 것으로 앞으로 전개할 수사과정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둘째, 범죄자를 추적하는 과정이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는 보통 범행 동기가 설명되며, 따라서 범행 이전에 있었던 역사가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셋째, 사건의 합리적 해결이다. 물론 해결을 도맡은 주인공은 유능한 수사관이다. 이어 범행자들이 공공 경찰에 인도되는 것으로 사건은 막이 내린다.
뒤렌마트의 소설들은 이 같은 전통적 탐정소설의 도식과 상당 부분 어긋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판사와 형리〉 발단부는 전통적 탐정소설의 도식을 따른다. 한 경찰관의 살해 현장이 발견되고, 주인공인 수사관 베르라하는 이 사건 수사를 위임받는다. 그러나 곧이어 수사 진행이 도식과는 다른 양상으로 굴절된다. 웬일인지 수사관은 사건 해결에 적극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다만 한 살인 용의자를 점찍어놓고 (그가 살인자였음을 독자는 책을 독파한 연후에나 알게 된다) 그를 자신의 조수로 기용한 뒤, 용의자의 거동을 수동적으로 ‘관찰’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요컨대 그는 행동하는 민완수사관은 결코 아니다. 이 부하 직원의 이름은 ‘찬츠’ 그는 실상 베르라하가 본래 염두에둔 다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잡은 하나의 ‘찬스’ 또는 ‘도구’였음이 마지막에 밝혀진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는 두 갈래의 사건 이전의 갈등이 있는 셈이다. 즉 A. 살인으로 표출된 슈미트 대 찬츠의 질시 관계 B, 베르라하와 가스트만사이의 40년 묵은 적수 관계. 이 같은 두 갈래 개별사건이 줄거리를 구성하는데 작가측은 A 경우보다 B 경우에 초점을 맞춘다. B의 갈등은 40년 전 ‘우연히’ 했던 하나의 ‘내기’가 발단이 된다. 책의 중심부에서 재현되는 이 내기 장면에서 베르라하와 가스트만은 각기 자신들의 명제를 내세운다. 베르라하의 명제인즉 ‘우연’의 개입 때문에 완전범죄란 불가능하다는 것이요, 가스트만의 주장인즉 바로 ‘우연’에 맡겨진 세상의 형태가 발각되지 않는 범죄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가스트만은 베르라하의 코앞에서 살인을 저지르고도 무죄로 풀려난 뒤 40년 동안 자신의 명제를 성공적으로 관철해왔다 이제 베르라하는 적수의 범죄를 입증할 ‘마지막 찬스’를 잡은 셈이다 이처럼 하나의 ‘내기’로 매듭지어진 두 적수의 관계에서 궁극적 승자는 과연 누가 될까? 이를 판가름하는 것이 결국 소설의 중심 사건을 구성하며, A의 살인 사건은 이 본원적 매듭에 우연히’ 걸린 부대사건이 된다.
이 적수 관계는 두 사람의 희생자를 낳는 것으로 끝난다. 가스트만은 찬츠와의 총격전에서 죽음을 당하며, 찬츠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로써 얼핏 보기에 사건은 모두 사필귀정으로 결말지어진 듯하다.
그러나 이 결말은 결포 합리적 해결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가스트만도, 찬츠도 공적 법 기구에 이송되지 않는다. 그들의 범법 행위는 영원히 공개되지 않은 채 죽음을 앞둔 베르라하의 의중에 묻힌다. 그런가 하면 베르라하가 무슨 근거로 자칭 판관 노릇을 행사하는지도 석연치 않다. 과연 그는 승자일까? 왜 그는 합법적 수단을 쓰지 않고 우연한 범죄를 자신의 완고한 계획에 이용하는 독단을 범하는 걸까? 이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은 부연 설명이 있어야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판사와 형리〉에서 베르라하는 자기 식으로나마 사건을 요리하는 비교적 유능한 위치에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가 수사를 펼친 것은 아니지만(그의 관점에서 보면 살인 사건은 이미 처음부터 해결되어 있었으니까), 자신의 계획을 투철히 밀고 가는 판관 역을 제멋대로 유희할 수 있었다. 뒤렌마트는 전통적 탐정소설의 법칙이 불합리함을 입증하려 했고, 결과적으로 이 장르 자체가 지양된 소설을 썼다고 할 수 있다 ‘문예비평의 저울로는 달리지 않을 만큼 가벼운’ 옷을 입고 ‘무게 있는’ 문학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뒤렌마트의 탐정소설은 그 독자적 위치와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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