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경헌 '래빗 헌팅'

clint 2023. 1. 2. 10:08

2023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심사평 - 심재찬 연출, 김명화 극작가

코로나 탓인지 고독하고 어두운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격리와 비대면이라는 고독의 시간은 때로 작가들에게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선물을 주기도 한다. 올해 희곡 분야 지원 작품은 총 107, 신춘문예 지원작 편수로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일정 수준을 유지했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연극적으로 구축하려는 단단함이 읽혔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콤메이트''래빗 헌팅' 두 편이었다. '콤메이트'는 기성세대의 결혼제도 및 가치관을 전복한 세태풍자극이다. 여러 빛깔의 재료와 토핑을 샐러드 볼에 담아놓은 듯 혹은 샐러리가 입속에서 아삭거리듯, 가짜 결혼식을 거행하며 세태를 풍자하는 작가의 솜씨가 화사하고 싱싱했다. 컨셉이나 풍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등장인물의 생명력이 약한 것이 흠이었다.

'래빗 헌팅'은 묵직한 작품이다. 숙직실에서 도박판을 벌인 고등학교 교사들의 이야기인데, 트럼프 놀이로 세상살이를 비유하는 솜씨나 손에 들고 있는 패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 플롯의 기술이 좋았다. 자칫 밋밋할 정도로 뚝심있게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카오스의 이면, 세상의 부조리와 부도덕에 우리 역시 한 발 담그고 있다는 서늘한 진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다이알로그가 번역극을 읽듯 건조했으나, 그 결함이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인 결말이었다.

두 편의 작품은 결이 달라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남은 것은 선택이다. 심사위원들은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작품이 어떤 작품일지 고민했고, '래빗 헌팅'을 선정작으로 선택했다. 지금 이 시대의 불편한 혼돈에 대해 우리들은 정말 아무 책임도 없는 것일까. 선명한 분노만으로 과연 이 세상의 혼란이 극복될 것인가. '래빗 헌팅'의 문제의식은 우리 시대와 충분히 공유할만한 무게를 지녔고, 막이 내린 뒤에도 관객들에게 여운을 주리라 믿는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그 외 미혼모의 불안함을 감각적 언어로 표현한 '태어나는 법'과 개인의 무력함을 역사에 기대 재치있게 묘사한 '무명병사' 역시 주목한 작품이다.

 

당선소감 - 이경헌

저는 월드시리즈오브포커(World Series of Poker·WSOP) 영상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포커 플레이어들은 상대방에게 정보를 주지 않으려고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합니다. 그렇지만 시청자 입장에서는 어떤 플레이어가 어떤 카드를 받았는지 아는 상황에서 경기를 관전합니다. 포커는 정보의 불균형을 전제하는데 영상은 전지적인 시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정보를 가지고 경기를 지켜보면 미세한 변화가 눈에 들어옵니다. 무표정한 얼굴 이면에서 설렘과 두려움 같은 감정이 스쳐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래빗 헌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저는 연극을 보기 전에 먼저 희곡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연극의 매력은 서사를 따라가는 것보다 인물의 감정 변화를 따라가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말을 아는 것은 연극을 즐기는 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같은 이유로 동일한 연극을 반복하여 보는 것은 전혀 지겨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인물은 유약한 마음을 위악적인 태도로 숨기려고 합니다. 어떤 인물은 차가운 논리로 뜨거운 내면을 감추려고 노력합니다. 객석에서는 전지적인 시점에서 인물의 감정을 건너다보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연극에 빠져든 이유였습니다.

조해진 선생님께 소설을 배우는 동안에는 제 감정에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조광화 선생님께 희곡을 배우는 동안에는 제 감정에서 한걸음 떨어져 관계 속에서 그것을 재인식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두 선생님께 단순하게 소설과 희곡을 배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은 두 분을 만나면서 사람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두 선생님께 배운 것을 기억하면서 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람의 마음도 지나치지 않는 극작가가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래빗 헌팅을 읽어주신 심사위원분들과 독자분들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실감할 때마다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하겠다는 예감이 들 때는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기분이 들 때만큼 괴롭습니다. 그런 순간에는 외로움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래빗 헌팅을 통해 저와 끝까지 교감을 시도해준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힘든 순간마다 펼쳐보는 위로가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이 희곡이 어떤 방향으로든 마음을 움직였다면 우리는 극장에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치지 않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1993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전문사 입학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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