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남석 '수인(囚人)의 노래'

clint 2022. 4. 5. 20:15

 

 

 

작품은 최초의 눈물의 여왕으로 불리던 이경설과 그녀의 삶

그리고 그녀의 연기인생을 희곡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작품은 이경설 연구의 근거를 빌어 연극적 상상력으로 재가공한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실명을 사용했지만,

그들의 행동 양상과 심리 상태는 자료를 보고

작가의 상상력으로 추정한 것이며,

시기적으로 작품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상당하다.

그럼에도 당시의 연극 상황과 극단 환경을 묘사하기 위해서

그들의 실명을 고집하였다.

이 작품은 이경설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이 땅에서 여배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삶과 그들의 삶이 가져오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경설

 

악극과 영화에서 최루성 연기를 펼쳐 눈물의 여왕이라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전옥 이전에 이미 원조 눈물의 여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경설(李景雪, 19121934)이다. 이경설은 불과 열다섯의 나이에 은막에 데뷔해서 각종 영화와 악극에 출연하며 대중들의 최고인기를 한 몸에 모으고 활동하다가 갑자기 얻게 된 몹쓸 병으로 방년 22세의 한창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이경설의 이런 안타까운 생애를 생각하면 가슴이 슬픔으로 꽉 메어진다.

이경설은 일찍이 1912년 강원도에서 출생한 뒤 곧 아버지를 따라 함경북도 청진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거기서 보통학교를 다녔고, 배우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나중에 병이 들어 1934년 서울에서 낙향해 세상을 떠난 곳도 청진의 신암동이었으니 청진은 이경설의 진정한 고향이라 하겠다. 부친은 그곳 청년회 회장을 맡아했고, 어려서 아버지의 인도로 아동들의 무대에 출연했던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 소녀시절, 이경설의 이웃에는 아주 단짝으로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일찍 시집을 갔다가 한 해만에 친정으로 쫓겨 와 고독하게 살다가 자살을 했다고 한다. 이경설은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큰 충격을 느꼈고, 여성에게 극히 불리한 혼인제도에 대해 부정적 관점을 갖게 되었다. 이런 과정이 영향을 주었던지 배우가 되고난 뒤에도 이경설의 표정과 연기는 슬픔으로 가득한 얼굴에다 가녀린 인상, 거기다 처연한 액션까지 보여주어서 부녀자 관객들은 이경설의 연기에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걸핏하면 소외된 처지에서 마구 희생당하는 조선여성의 삶에 대하여 이경설은 그 누구보다도 연민과 애정을 갖고 그것을 연기에 쏟아 부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경설의 연기를 떠올리면 오로지 ‘눈물과 한탄’ 두 가지다. 이경설은 청진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 예술학교에 들어갔으나 곧 문 닫았고, 고려영화제작소에 입사했지만 그 회사마저 해체되고 말았다. 현철이 문을 열었던 조선배우학교란 곳을 들어가서 대중문화전문가 왕평(王平 이응호)과 동기생이 되었고, 이후 막역한 친구가 되었지요. 이경설은 여러 악극단에 단원으로 들어가 전국을 떠돌았다. 이 무렵에 굶기를 밥 먹듯이 했고, 아파도 돌보는 이 없이 무대에 올라야만 했던 슬픈 시절이 있었다. 1924년 이경설이 참가했던 동반예술단도 흩어진 악극단 중의 하나다. 당시 악극단 공연은 신파극을 중심으로 무술, 기계체조를 곁들여서 공연을 했는데 이경설은 여기서 가수이자 배우였던 신일선(申一仙)과 함께 노래와 연기를 계속하며 대중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갔다. 이경설의 나이 16세 되던 1928년 그 예술단도 해체되어버렸고, 이후 정착하게 된 곳은 김소랑(金小浪)이 이끌던 극단 취성좌(聚星座)입니다. 여기서 이애리수(李愛利秀), 신은봉(申銀鳳)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여배우 트리오로 연기와 가창 두 분야에서 눈부신 활동을 펼쳤다. 1929년 이경설은 조선연극사, 연극시장, 신무대 등으로 활동의 터전을 옮겨 다녔습니다. 이경설이 세상을 하직하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신무대 소속의 단원이었다. 1920년대 후반 공연장 무대에는 연극의 막과 막 사이의 시간적 공백을 메워주던 막간가수가 있었다. 무대장치를 변경시키기 위해 일단 막을 내리고 나면 그 빈 시간을 메우기 위해 커튼 앞에 나와서 노래를 들려주던 가수가 바로 막간가수입니다. 그 막간가수는 가창력이 뛰어난 배우를 골라서 관객 앞에 내보냈던 것이다. 이애리수, 이경설, 강석연, 신은봉, 김선초 등은 모두 막간가수 출신들이다. 1933년 이경설은 지병이었던 결핵이 점점 악화되어 일본 오사카, 북간도 용정 등지로 요양을 다녀왔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1934년 8월28일 청진의 신암동 자택으로 돌아가서 불과 22년의 짧았던 생애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