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 이상호
볼거리와 사색거리를 아우를 줄 아는 솜씨
오늘날 문화 전반이 그렇지만 현대극 역시 사색보다는 볼거리 중심으로 가는 경향이 강하다. 새삼스레 뮤지컬이나 뮤지컬 요소를 도입한 작품과 악극이나 마당놀이 풍의 작품들이 해마다 인기를 끄는 까닭도 우연이 아니다. 현란한 영상문화가 범람하는 시대, 게다가 어느 때보다도 살기 힘들고 바쁜 세상이기에, 머리 아프게 생각하고 고민하여 그윽하고 깊은 삶의 진실에 도달하려 애를 쓰는 독자나 관객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이든 연극이든 점점 깊고 무거우며 사색을 요구하는 작품들이 줄어드는 반면, 가볍고 재미있는 볼거리 중심의 작품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옥란의 희곡 『바람이 불어오네』도 요즘의 작품 조류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가령, 나레이터 모델을 등장시켜 현란한 사이버 풍의 춤을 추며 길거리 선전을 하는 이벤트 행사장면을 구성한 대목에서 그런 냄새가 풍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결코 한바탕 가볍게 즐기고 말면 될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그런 뻔한 세태의 볼거리의 이면에는 여전히 자식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우리네 어머니들로 인하여 많은 번민과 갈등을 겪으면서 자라는 아이들, 그리고 그것이 축적되어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어느 極端에 이를 때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는 점을 작품의 뼈대로 하고 있기에 독자나 관객의 가슴 한 구석에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면서 깊은 사색을 요구한다. 이렇듯 대조적인 두 요소를 적절히 아우르고 있다는 점이 바로 이 작품의 장점이자 변별력이 된다. 이 작품은 몇 해 전에 실제 일어났던, 생각하기도 싫은 어떤 끔찍한 사건이 창작의 모티프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일과 구제역으로 인해 도살당할 수밖에 없는 가축들의 수난이 중첩되면서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병이 들면 인간이나 짐승이나 끔찍하고도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보여주고 싶었던 듯하다. 다만, 두 제재가 중첩되는 연결 고리에 섬세한 장치와 더불어, 지나치게 억압을 주는 어머니에 대해 증오심을 키우다가 끝내 해서는 안 될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르게 되는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에 대한 묘사와 극적 반전의 깊이가 다소 부족하다는 점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두 제재를 엮어 하나의 메시지로 융합해내는 솜씨와 자신이 설계한 이야기 도면을 나름대로 소화하고 조직화하는 능력이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앞으로 좀더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작가로서의 길을 개척해간다면 충분히 제 몫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작가로서 다시 태어나는 당선자에게 먼저 축하의 말을 건네며, 아울러 어떤 예술 분야든 작가 스스로 치열함을 상실할 때에는 긴장이 풀어져 그저 볼품없는 타작이나 생산하여 아까운 시간만 낭비할 뿐이라는 점 명심하고 쉼 없는 정진 있기를 바란다.◑
작가의 글 - 김옥란
천성적으로 나는 극적인 것을 좋아한다. 보색(補色) 대비의, 빨갛고 파란, 알록달록 촌스럽게 섞여서 강렬한 느낌을 주는 색깔들을 좋아하고, 느리게 시작했다 격렬한 호흡으로 소리 지르고 날뛰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침떼고 음울한 잠언을 읊어주는 노래를 좋아하고, 도저히 똑같은 한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갑자기 얼굴을 바꾸고 목소리를 바꾸고 이상한 세계로 들어가 버리는 배우를 좋아한다. 내가 어떻게 연극을 좋아하게 되었는지의 기억은 희미하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연극이라는 걸 본 기억도 없다. 우연히 민속학 시간에 따라가서 보게된, 도봉산 비닐하우스 무당집에서 본 굿이 제대로 된 연극 체험의 시초라면 시초이다. 울긋불긋 요란한 무늬와 색깔로 치장한 옷과 부채, 시끄러운 방울소리, 비린내 나는 돼지피 냄새, 북 치고 장구 치고 태평소 불어대는 어수선한 그곳에서 비빔밥 얻어먹어가며 하루 온종일 연극의 신내림을 받았던 것일까. 지금의 나는 10년 공부 정진 끝에 연극을 전공하는 박사가 되어 있고 소위 전문가가 되어 있다. 이 또한 극적인 일이라면 극적인 일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또 한번의 극적인 일을 꿈꾸고 있다. 작가가 되겠다고, 극작가가 되겠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직은 내 안에 고였다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받아적을 뿐이지만. 그래서 아직 마르지 않은 날개로 덜덜 떨며 한길에 나선 것이나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그래도 언제나 따뜻한 말씀으로 격려해주시는 선생님들이 계셔서 부끄러운 마음을 무릅쓰고 간신히 세상에 나가게 될 결심을 했다. 연극(희곡)을 전공하면서, 특히 굿과 판소리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게끔 이끌어주신 모교의 윤재근 선생님, 그리고 시적 감수성으로 연극을 바라보게 해주신 이상호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어서 비로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심지 약한 못난 제자가 중도에 뜻을 꺽지 말고 계속 나아가라는 뜻에서 이런 자리 또한 마련해주신 것이리라. 그분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계속 좋은 작품을 쓰고, 좋은 연극을 올리는 일일 것이다. 정직하고 담대하게 내 앞에 열린 길을 걸어나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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