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비를 피해 한 건물의 지하실로 뛰어든 여인은 작은 화실을 발견한다.
그림을 보던 여인은 문득 그림을 배우고 싶어진다.
화실을 지키던 화가는 “더 이상 그림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인은 딱 일주일만 배우겠다며 화가를 설득한다.
화가는 5만 원의 강습료 선불을 요구한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여인은 “거래보다는 교환”이라며 대신 자신이 바이올린을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조태준 작 ‘3cm’의 서막이다. 화가와 바이올리니스트의 우연한 만남. 가을 분위기에 어울리는 낭만적 구도다. 그 다음 공식은 뭐일까. 뜨겁게 타오르던 그들의 사랑이 운명의 장난으로 비극적 파국을 맞는 것이다. 절반은 맞았고 절반은 틀렸다. 비극적 파국은 있어도 뜨거운 사랑은 없다. 사랑은 오히려 비극 다음에 찾아온다. 엇박자의 사랑. 연극의 제목은 바로 그 어긋난 운명의 짧은 거리를 말한다. 연극의 재미는 3cm라는 크기 또는 거리가 예술과 인생을 통해 변주되는 것을 지켜보는 데 있다. 그것은 무당벌레처럼 작은 존재의 미학을 화폭에 옮기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크기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G음(솔)과 바로 이웃한 A음(라)을 낼 때 현 위의 거리이다. 후천적으로 색맹이 된 화가가 절망적으로 붓질한 그림의 제목이자 음악가의 길을 포기한 여인이 개장할 카페의 이름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사랑의 열매를 맺었을지도 모를 그들의 사랑이 어긋난 거리이다. ‘보이는 음악’과 ‘들리는 그림’ 그리고 그 둘의 변증법적 결합으로서 시의 미학을 무대언어 화하려는 열정이 풋풋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예술적 교류가 구체적 삶에 어떤 윤리적 변화를 가져왔는지가 빠진 탓에 다소 공허하게 느껴진다. 여주인공을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끝까지 타자화하기보다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욕망하는 주체’로 형상화하려는 노력이 못내 아쉽다.
작가의 글
인간의 생명이 그러한 것처럼 사랑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사인(死因)을 갖고 태어난다. 나는 사랑의 순례자들이 필연적으로 앓고 있는 지병을 그리움이라 생각한다. 누군가 농담처럼 말했다. 이 세상엔 두 가지 사랑만 있을 뿐이라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어떤 것이든, 사랑은 무수한 죽음, 즉 그리움 속에 거듭 태어나는 것임을 희곡 <3cm>의 창작 모티브들 가운데 몇몇 부분은 실제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무엇보다도 소위 ‘카페 모티브’가 그렇다. 대학 학창시절, 내 젊음의 기억 속에 각인된 낯선 사건 하나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이 위치한 서울 명륜동은 십수 년째 ‘범죄 없는 마을’로 신문까지 기사화되어 소개된 적이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그 기사가 난 지 얼마 안 되어 기록은 거짓말처럼 깨지고 말았다. ‘장 주네’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작은 카페의 여주인이 살해된 것이다. 아, 장주네라니... 왜 하필! 사실 난 과거 그 사건의 전모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당시 젊은 대학생의 일상에서 카페란 그야말로 색기와 낭만의 필연적인 공간 배경쯤 되는 곳이었으므로 내가 그 불운한 여주인을 실제로 본 적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 조그마한 카페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지 모를, 그 젊은 여주인의 죽음과 그것이 야기 하는 상상력의 잔존물은 무수한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내내... 이 작품의 기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참고로 작품 제목 ‘3cm’는 내가 가끔 드나들었던 또 다른 작은 카페의 실제 이름이다. 또한 석현의 대사 속에 언급된 ‘슈만과 클라라’ 역시 대학로 혜화역 4번 출구 인근에 있던 클래식 카페의 상호와 관련이 있다. 드라마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화가와 바이올리니스트의 관계 모티브는 또 다른 실제 상황에 근거한다 이 부분에 관한한 가깝게 지내던 미술과 선배 교수의 젊은 날 에피소드를 정식으로 차용하였음을 밝혀 둔다. 조각하는 남자 대학원생과 피아노 전공하는 여대생. 음악과 미술 교습을 통한 너나들이, 헤어진 뒤에 비로소 알게 된 감정의 실체 등, 이 안타까운 로맨스의 밑그림이 없었다면 아마 희곡 <3cm>는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석현이라는 인물의 형상화 과정에는 내 슬픈 개인사가 일부 개입되어 있다. 이 작품을 빌려 젊은 나이에 요절한 내 대학 동기, 대룡이에게 각별한 우정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요르단으로 떠난 어머니‘, ‘혜화동 태극당제과’는 작품 <3cm>의 가장 암울한 모티브이면서 동시에 친구 대룡이의 슬픈 사모곡을 구성하는 정점의 이미지들이다.
서사의 차원에서 작품 제목 ‘3cm’는 어긋남과 그로 인한 필연적인 그리움의 거리를 상징한다. 어쩌면 산다는 건 그 자체가 어디로 부턴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어긋남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언젠가 확연히 기억하고 있는 나 자신으로부터의 어긋남, 내가 필연이라 믿고 있는 삶의 동기와 과정의 어긋남, 그저 내가 아닌 타인과의 어긋남, 생각과 행동의 어긋남… 동시에 그 어긋남이 야기한 거리(距離)는 그리움의 고통이 내재하는 힘겨운 노력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서로의 차이는 다가섬의 동기이자 엇갈림의 징후 서로를 알아 간다는 것은 피차 익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서로를 느끼려는 순간 그것만큼의 불편함을 수반하는 것 원래 상처 입은 자에 대한 연민은 결핍된 시간의 울타리 안에 쉽사리 구속되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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