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안톤 체호프 '바냐 외삼촌'

clint 2021. 3. 31. 11:16

 

 

바냐 외삼촌1889년에 체호프가 집필한 숲의 수호신을 개작한 것이다. “어떻게 당신은 지난 25년 동안 남을 위해 살아올 수 있었는가?" 독자는 질문할 것이다. 바냐는 왜 한 번도 지신의 삶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나는 누굴 위해 살고,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으며, 삶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바냐 외삼촌은 한 인간의 현실로부터 이토록 많은 철학적 질문을 이끌어내는 사실주의 작품이다.

 

 

바냐 외삼촌1889년에 창작한 숲의 수호신을 새롭게 고쳐 쓴 것이다. 1897년 체호프의 희곡이라는 모음집에서 처음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모음집이 출간된 후에 여러 지방극장에서 성공적으로 상연되었다.

니즈니 노브고로트에서 상연된 희곡을 보고 고리키는 189811월 체호프에게 편지했다. “바냐 외삼촌을 보았습니다. 공연을 보고 여편네처럼 울었답니다. 신경이 예민한 인간도 아닌데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대단한 작품입니다. <바냐 외삼촌>은 완전히 새로운 연극예술이며, 대중의 비어있는 머리를 후려치는 망치입니다. <바냐>의 마지막 막에서 의사가 기나긴 사이 뒤에 아프리카의 더위에 대하여 말할 때 당신의 재능 앞에 황홀해져서, 인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삶 때문에 전율했습니다.”

고리키의 언명은 작품의 본질에 관한 정확한 지적 가운데 하나다. <갈매기>에서 갈매기에 부여된 상징과 바냐외삼촌에서 멀리서 반짝이는 등불에 주어진 상징의 의미는 관객과 독자들의 심금을 오래도록 울리는 것이었다. 자신이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임에도 스스로가 별임을 알지 못하는 아스트로프의 냉소주의는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아스트로프라는 이름은 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스트론에서 나온 것이다.

말르이 극장은 바냐 외삼촌상연을 제안했고, 18992월 체호프는 제안에 동의하는 편지를 쓴다. 그러나 189948일 연극· 문학위원회 페테르부르크 분회는 원고 수정과 수정원고를 위원회에 회부할 것을 상연조건으로 내세웠다 그 같은 결정에 불복한 체호프는 바냐 외삼촌을 즉시 모스크바 예술극장으로 넘긴다. 예술극장에서 바냐 외삼촌18991026일 초연되었다. 수많은 전보가 체호프에게 성공을 통보했다 하지만 바냐 외삼촌의 공연이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체호프의 4대 장막극 가운데 두 번째 희곡인 바냐 외삼촌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대목은 시간에 유폐된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희곡의 사건은 바냐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47살의 나이에 느닷없는 자의식으로 고통 받는 철부지 같은 인간 바냐. 그는 지난 25년간 매제인 세레브랴코프를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왔다. 연봉 500루블이라는, 거지에게나 적선하는 돈을 받고 황소처럼 일했던 그가 갑자기 자신의 본령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바냐의 자의식 회복이 가져온 혼란과 무질서가 희곡의 주요 갈등으로 작용한다.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 이제는 세레브랴코프의 아내가 되어버린 아름다운 여인 엘레나 안드레예브나를 향한 연정, 자기의 입장과 처지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냉정한 인간 세레브랴코프에 대한 분노, 앞으로 남아있는 무의미하고 덧없는 인생에 대한 비극적인 성찰 등으로 바냐는 너무도 괴로운 것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상황이 소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소냐에게 남겨진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되어 있다. 이제 24살 밖에 되지 않은 소냐의 기나긴 세월과 시간은 누구를 위해 어떻게 쓰일 것인가. 아스트로프를 향한 사랑이 전혀 보답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냐는 무엇을 보면서 기나긴 세월을 살아갈 것인가. 바냐 외삼촌에는 이런 비극적인 음조가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장면에서 소냐는 슬픔과 절망을 딛고 일어나 외삼촌을 위로한다. 바냐 외삼촌가운데 가장 시적이며 고상한 어조로 가득찬 독백에 가까운 소냐의 대사는 외로움과 회한, 막혀버린 출구 때문에 괴로웠던 숱한 동시대인들을 향해 던져진 청량한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다.

바냐 외삼촌에 대한 최고의 찬시는 고리키에게서 나왔다 바냐 외삼촌갈매기는 새로운 드라마 예술이며, 거기서 사실주의는 감동적이며 깊이 고안된 상징에까지 고양되고 있다고들 말합니다. 그것은 매우 타당한 생각이라고 믿습니다. 당신의 희곡을 들으면서 저는 우상에게 희생된 삶에 대하여, 인간들의 저급한 삶에 개입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그리고 여타의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다른 드라마들은 당신의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인간을 현실로부터 철학적인 일반화에까지 확산시키지는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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